우크라이나 시민들은 집이나 지하철 방공호 등에서 전쟁을 견뎌내고 있다. EPA 연합뉴스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신청. 검색창에 ‘에스레터’를 쳐보세요.
“지금은 2차 대전 뒤 유럽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다.”
2022년 2월24일. 알렉산더르 더크로 벨기에 총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이 같은 성명을 냈다. 유럽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 어느새 240일을 넘어 끝을 알 수 없게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올가 그레벤니크 작가는 끔찍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았다. 침공이 시작된 첫날 그는 “혹시나 사망 후 식별을 위해서” 9살 표도르와 4살 베라, 그리고 자신의 팔에 이름과 생년월일, 전화번호를 적었다. 그리고 침공 직후부터 20여일간의 가족의 삶을 연필화로 그려 그림일기 책 <전쟁일기>를 냈다. 그는 지난 5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남긴 기록이 <전쟁일기>이지만, 저는 이제 다시는 그런 글을 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의 남편과 어머니는 아직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다.
침공 뒤 8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전쟁의 양상은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점령지를 회복하는 쪽으로 뒤바뀌고 있다. 그러나 전쟁은 이미 무수한 파괴와 죽음을 빚었고,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남아 있다. 올가와 그의 가족처럼 평범한 이들의 삶은 어떻게 계속되고 있을까? 올가 그레벤니크 작가가 전쟁의 잔혹함을 그린 그림과 그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왔다. 편집자
그림책 작가 올가 그레벤니크는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서 태어났다. 자신의 작품세계에서 러시아어 문화권 전통의 은유를 그린다. 그는 이번 표지 그림에 대해 “러시아어권에서 전쟁의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늙은 마녀로 묘사되며, 러시아어에서 ‘전쟁’이란 단어는 여성 명사”라고 설명했다. 그림 올가 그레벤니크
드디어 휴대폰이 아닌 노트북으로 원고를 쓴다. 집을 떠난 지 6개월 만에 드디어 내가 아끼는 물건들이 도착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옛 사진이 담긴 노트북, 엄마가 선물해주셨던 도트무늬 원피스, 행복한 추억들을 되살리는 좋아하는 향수, 딸아이를 위해 내가 한땀 한땀 바느질해 만들었던 헝겊인형, 아들이 네살 때 그린 사자 그림, 그리고 책 한권. 내 모든 ‘보물’들은 단 하나의 기내용 가방에 쏙 들어갔다. 집에서 온 가방, 집을 대신하는 가방, 집이 된 가방.
그러나 사랑하는 이들은 이곳으로 데려올 수도, 우편으로 보낼 수도 없다. 복잡한 상황들의 매듭으로 그들은 지금 머무르는 장소에 묶여 있다. 수화기 너머 그들의 목소리를 오롯이 들을 뿐이다. 이제 나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
벌써 머나먼 과거 같은, 눈이 펑펑 내리던 3월 더이상 야간 공습을 견딜 수 없어 나는 모든 걸 버린 채 지하 방공호를 뛰쳐나왔다. 두 아이의 손을 붙잡고, 등 뒤에 백팩 하나를 메고 강아지 미키를 데리고서 말이다.
다시 공습이 시작되기 전 서둘러 기차역에 도착해야 했다. 아무 기차에나 뛰어들어 가능한 한 빨리 2022년 2월의 공포로부터 멀어져야만 했다. 전쟁 직전 아늑했던 그 저녁을 선명히 기억한다. 남편과 나는 새로 구입한 아파트 수리, 우리 아이들의 학원 생활 등 우리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행복하게 나누었다. 다시 오지 않을 마지막 행복한 밤이 되리란 것을 상상조차 못한 채. 새벽 5시 우리는 이상한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주 잠시 별일 아닐 거라고, 폭죽 소리일 거라고 희망을 품었지만, 폭발음은 사방에서 울렸다. 그렇게 우리는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뱃속의 오싹한 공포였다. 지난 전쟁의 나날들 중 가장 끔찍한 순간이었다. 그들이 나를 죽이러 왔는데 탈출구가 없다는 느낌….
올가 그레벤니크 작가가 전쟁 초기 가족들의 삶을 연필화로 그려 책 <전쟁일기>에 수록한 그림. 출판사 이야기장수 제공
비상용 짐을 싸기 시작했다. 서류, 현금, 속옷. 뭐라도 해야만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엔 너무 무서웠다.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한 채 수수밥을 씹었다. 아이들은 잠들어 있었고, 나는 아이들이 깨어났을 때 이 모든 일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공포에 질려 있었다.
먼저 큰아들 페자(아들 표도르의 애칭)가 일어났다. 늦잠을 자서 학교에 늦을까 우왕좌왕하는 아이에게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왜요? 그리고 이건 무슨 소리예요?”
“폭격 소리야.”
우리는 대답했다.
조금 뒤 딸 베라도 잠에서 깨어났다. 다 같이 양치질을 하는데 냉정과 동시에 패닉 상태에 빠진 나는 우리들의 팔에 이름, 전화번호, 생년월일을 적었다. 어떻게든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얼마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조금만 참으면 금세 끝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폭격은 점심때가 되어서도 끝나지 않았고, 소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결국 우리는 지하실에 내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이웃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어두컴컴한 조명, 모래 가득한 바닥, 콘크리트 벽과 수도관. 지하실에 모여 있는 모두가 겁에 질렸고 근심에 잠겨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모래가 위로 솟아올라 숨쉬기가 힘들었다. 모든 이웃 주민들은 휴대폰으로 뉴스를 스크롤하며 바깥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았다. 폭격 소리가 날 때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9층에서 급히 뛰어내려오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우리는 지하실에서 밤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첫날 밤은 공포 그 자체였다. 수도관에서 나는 물 흐르는 소리가 폭발음인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깥 마당은 고요하고 어두웠다. 우리는 도망칠 수 없는 궁지에 몰려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그곳에서 8일 밤을 보냈다. 조금씩 지하실에 적응하고, 아늑하게 꾸미기 시작했다. 지하실이 가장 안전한 장소 같았고, 아이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지하실로 내려갔다. 오히려 외출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우리는 아이들이 지하실에서도 재밌는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내고 단장하기 시작했다. 지하 방공호는 어느새 작은 유치원으로 변신했다. 그렇지만 매일 이웃 중 누군가 떠났고 그럴 때마다 너무나 슬퍼졌다. 불안은 커져만 갔고, 절망감에 괴로워하다 나는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벌써 7개월 동안 나와 아이들은 낯선 나라, 낯선 집에서 살며 남의 옷을 입는다. 우리는 불가리아에 적응했다. 표도르는 불가리아 학교를 다니고 있다.
올가 그레벤니크 작가가 전쟁 초기 가족들의 삶을 연필화로 그려 책 <전쟁일기>에 수록한 그림. 출판사 이야기장수 제공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떠나기로 결심하고, 백팩 하나를 든 채 달려야만 했던 그 10분을 생생히 기억한다. 울고 있던 나의 엄마를 안았던 10분. 나는 아직도 눈물 가득한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엄마는 자신의 부모님과 남동생을 돌보기 위해 남으셨다. 폭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선이 아직 다다르지 않은 시골로 이사했고 지금은 어떻게라도 겨울을 나기 위해 장작을 비축하고 있다고 한다. 외삼촌은 매주 목숨을 걸고 직장에 다닌다. 월요일에 출근하고, 금요일에 퇴근한다. 외삼촌은 수도공급시설에서 일한다. 적군은 도시의 기반시설을 타깃으로 삼아 집중적으로 포격하기에 그곳에서 일하는 건 날이 갈수록 위험해지고 있다.
엄마는 먼 친척들의 집에서 숨어 지낸다. 가끔 음식과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잠시 외출하는 것 외에는 집 밖에 나가지 않는다. 엄마의 하루 속에는 오로지 뉴스, 집 앞마당, 그리고 반려묘밖에 없다. 엄마는 그 자신보다 연세가 훨씬 많으신 부모님을 돌보며 지내고 있다.
남편을 마지막으로 본 건 3월4일 르비우에서였다. 우리가 무사히 폴란드로 피난 갈 수 있도록 모든 걸 추진해놓고도 정작 본인은 우크라이나에 남아야 했다. 마지막 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우리가 온종일 껴안고 있었던 순간, 남편을 남겨둔 채 버스가 출발했을 때 내가 울음을 터뜨린 순간. 그는 점점 작아졌고, 혼자 그곳에 남겨졌다.
남편도 나처럼 화가이고, 현재 르비우에서 일하면서 사무실에서 지내고 있다. 가끔 내가 “아이 둘을 나 혼자 돌보면서 지내는 게 힘들다”고 하면 그는 “나는 완전히 혼자야”라고 대답한다. 우리 모두 ‘임시 신분’으로 지내고 있다. 나는 ‘임시 체류’ 자격으로 불가리아에서, 남편은 르비우에서 임시적으로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다. 엄마는 임시로 머무는 집에서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아파트로 하루빨리 돌아가고자 하는 꿈을 품고 살고 있다. 심지어 우크라이나의 우리 집도 현재 ‘임시 상태’에 머물고 있다. 유리문과 집 안의 모든 거울은 떨어진 채 바닥에 뒹굴고 있고, 창문에는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아무런 돌봄 없이 견디지 못한 식물들도 모두 죽어버렸다.
전쟁은 길어진다. 나는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부디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오직 그 희망 하나가 나를 지탱한다. 우리는 안전하고 아름다운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아픔을 느끼지 않기 위해 마음을 꽁꽁 묶어두었다. 매일 엄마를 걱정하고, 남편이 그립다. 밝고 행복한 것을 기다릴 뿐이다. 무의미한 이 전쟁의 끝을 기다릴 뿐이다.
지난 17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상공에 드론이 접근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가끔 하르키우에 남은 사람들과 연락하다 보면 최악의 상황을 대면하게 된다. 그들은 이토록 끔찍한 상황들에 적응했다. 어느덧 가장 악한 환경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더는 지하 방공호에 내려가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낮에는 카페와 공원에 간다. 그리고 밤이 되면 나의 도시는 여전히 미사일 공격을 당한다. 누가 다음 희생자가 될지 예측할 수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우리 가족이 겪었던 지난 2월의 끔찍한 나날들을 다시 겪는 것만 같다. 손이 떨리고 머리가 띵하다. “제발 전쟁을 멈춰!”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고, 무력함에 나는 숨이 막힌다. 그리고 나는 만트라(주문)처럼 반복한다. “어떠한 정치적 사상도 사람의 생명을 해한다면 존재할 가치가 없다.”
2022년 10월, 그림작가 올가 그레벤니크, 번역 정소은
1986년 우크라이나 하리코프(하르키우)에서 태어나 그림책 작가로 살고 있다. 아들 표도르(9살)와 딸 베라(4살)의 엄마이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엄마, 화내지 마> 등 그림책을 출간했고, 그의 책이 모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작품은 현재 22개국 개인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