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카자흐스탄 국경 지역인 러시아 첼랴빈스크주 마린스키에서 27일(현지시각) 카자흐스탄으로 탈출하기 위한 자동차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마린스키/AP 연합뉴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 병합 시도 등 초강경 우크라이나 침공 작전을 밀어붙이면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필사의 탈출’이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의 영토 병합이 임박한 우크라이나 헤르손 등에서는 주민들이 마지막 탈출을 서두르고, 전쟁에 끌려갈 것을 걱정하는 러시아인들은 조지아 등 이웃나라 국경으로 몰리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28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주와 자포리자주의 러시아 점령지에서 많은 주민이 살던 곳을 등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자포리자주 자포리자시에 설치된 유엔의 난민 지원 센터 앞에서 대기하던 우크라이나 주민 류보미르 보이코(43)는 “많은 사람이 모든 걸 포기하고 집을 떠나고 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 버려진 마을이 곳곳에 있다”고 전했다.
헤르손주 중서부 홀라프리스탄에서 부인, 자녀 둘과 함께 400㎞ 정도 떨어진 이곳까지 이동한 그는 “러시아 점령지 경계에서 이틀 동안 기다렸는데 러시아군이 어느 순간 갑자기 검문소 통과를 허용했다”고 전했다.
헤르손과 자포리자 점령지에서 빠져나온 주민들은 러시아군이 현재 검문소 한 곳을 통한 이동만 허용하고 있다며 이 검문소가 언제까지 열려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주민들이 가장 걱정하는 건 징집 가능 연령대의 남성들도 빠져나올 수 있는지 여부라고 보이코는 말했다.
자포리자주와 인접한 헤르손주 북동부 벨리카레피티하에서 빠져나온 타티야나 고로베츠(46)는 “검문소에서 군인들이 ‘왜 러시아를 떠나느냐’고 물어서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에 있는 자식들을 만나러 간다고 말했다”며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그는 남편과 함께 옷가지 정도만 챙겨서 떠나왔다며 야외에서 사흘 밤을 기다리다 우크라이나 통제 지역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고 전했다.
고로베츠 가족과 함께 나온 류드밀라 사프로노우(48)는 “압박감을 느껴 떠나기로 결심했다”며 헤르손의 학교들은 다음달부터 러시아 교육과정이 도입되고 수업도 러시아어로 진행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이런 학교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헤르손주 북부 베리슬라우에서 농업에 종사했다는 30대 남성은 “러시아와 합병을 위한 주민투표 때문에 주민의 70% 정도가 마을을 떠났다”며 “전기와 가스 공급이 끊기고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투표가 실시됐다”고 말했다. 그는 점령지를 벗어나려는 차량이 계속 이어지면서 차량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의 도네츠크과 루한스크, 헤르손, 자포리자 등 4개 지역에서 지난 23일부터 닷새 동안 러시아와 영토 병합을 위한 주민투표를 실시했으며 압도적인 찬성으로 영토 병합안이 통과됐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에서도 징집을 피해 고향을 떠나는 이들이 이어지고 있다. <에이피>(AP) 통신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1일 예비군 동원령을 내린 지 일주일이 지난 28일까지도 조지아 등 인근 국가로 탈출하는 러시아인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지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 북오세티야 지역에서는 국경을 넘으려는 차량들이 15㎞가량 이어지면서 심각한 교통 체증이 빚어지고 있다. 소셜미디어에는 러시아 국경 통제소가 국경 통과 기준을 완화하면서 걸어서 국경을 넘으려고 길게 줄을 서 대기하는 이들의 사진이 올라오고 있다.
북오세티야 공화국은 경계령을 발령하고 국경을 넘기 위해 기다리는 이들에게 제공할 물, 식량 등 구호품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조지아 쪽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나와 국경을 넘어온 이들에게 물과 담요 등을 주고 있다고 <에이피>가 전했다. 카자흐스탄의 러시아 국경 도시 오랄에서도 강당 건물 네 곳을 비워 러시아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있다.
조지아는 지난주부터 자국으로 들어온 러시아인이 5만3천명이라고 밝혔고, 카자흐스탄으로 입국한 러시아인도 지금까지 9만8천명이다. 옛 소련에서 분리 독립한 두 나라는 러시아인들에게 무사증(비자) 입국을 허용하고 있다. 육로를 통해 핀란드로 들어온 러시아인은 지난 주말 이후 4만3천명으로, 지금까지 전체 탈출 주민은 19만4천여명이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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