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등에 대한 군사 작전을 줄이겠다고 발표한 29일(현지시각) 남부 해안도시 미콜라이우에서 러시아군이 지방정부 건물에 미사일을 발사해 적어도 12명이 숨졌다. 미콜라이우/AP 연합뉴스
러시아가 29일 터키에서 5차 협상을 마친 뒤 협상 진전을 위해 북부 키이우와 체르니히우 주변에서 군사작전을 줄이겠다고 밝혔으나,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즉각적인 움직임은 관찰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군은 물론 미국 등까지 나서 러시아의 발표가 ‘기만전술’일 수 있다고 경계했고, 전문가들은 평화협상의 전망에 대해 엇갈린 반응을 내놨다.
영국 <비비시>(BBC) 방송은 이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군사작전을 축소하겠다고 밝힌 뒤에도 도시 주변에서 포격 소리가 이어졌다고 보도했다. 방송의 현지 특파원은 “키이우에서 15~25㎞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포격이 이어졌다”며 “러시아가 아직은 키이우 주변에서 군사작전을 실제로 줄이지 않은 듯하다”고 지적했다. 앞서 이날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5차 협상에 참석한 알렉산드르 포민 러시아 국방차관은 회담 뒤 “두 나라 간 신뢰를 키우기 위해 키이우 등에서 군사활동을 극적으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는 아직 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5차 협상 뒤 발표한 화상 연설에서 “협상에서 나오는 신호는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러시아 폭탄의 폭발 소리가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또 협상에서 분명한 결과가 나올 때만 이 말을 신뢰할 수 있다며 “아직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고 러시아군은 공격을 계속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군도 이날 밤 브리핑에서 러시아군이 키이우와 체르니히우에서 병력을 일부 철수했지만, 이는 병력 교대 작업이며 우크라이나군을 속이려는 기만전술일 수 있다고 밝혔다. 또 “몇몇 징후를 보면 러시아군은 동부 지역에 집중하기 위해 조직을 재정비하고 있다”며 남동부 도시 자포리자 인근 지역 두곳에서 요새를 쌓고 지뢰를 매설하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전했다. 남부 해안도시 미콜라이우에서는 러시아군이 지방정부 건물에 미사일을 발사해 적어도 12명이 숨지고 33명이 다쳤다.
미국 등 서방 지도자들도 러시아의 진의를 파악하려면 좀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고 밝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가 행동에 나서는 것을 볼 때까지 어떤 예단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존 커비 미 국방부 대변인도 키이우 공습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면서 “러시아군은 여전히 키이우를 포함한 우크라이나에 만행을 저지를 수 있다”고 했다. 독일 정부는 올라프 숄츠 총리 등 미국·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 주요국 정상들이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지속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분분하다. 러시아의 정치학자 그리고리 골로소프는 “5차 협상에서 실질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양쪽 모두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걸 과시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새뮤얼 그린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러시아연구소 소장은 “인명 살상을 끝내는 휴전 논의는 좋은 소식이지만, 이는 평화와 분쟁 해결에 대한 논의는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치학자인 키릴 로고프는 5차 협상이 전쟁의 전환점이 될 수 있으며 이번 협상을 계기로 러시아가 전쟁 규모를 단계적으로 축소할 것으로 봤다.
러시아 쪽도 이번 발표가 전투 중단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러시아의 수석 협상대표인 블라디미르 메딘스키 대통령 보좌관은 이날 러시아 <타스> 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이번 조처는 전투 중단이 아니며 우리의 희망은 전투를 점차로 줄여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한 전화통화에서 남동부 마리우폴의 우크라이나 ‘투사들’이 무기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리우폴은 사실상 러시아군에 함락된 상태이지만 우크라이나군은 저항을 이어가고 있다.
신기섭 선임기자,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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