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4일 우크라이나 침공 개시를 밝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일로 불과 엿새 만에 유럽과 세계의 지정학적 질서가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 사이엔 60여년 만에 핵 갈등이 재발했고, 독일·스웨덴·핀란드 등은 전후 70여년 동안 유지해온 외교안보 노선을 전환했거나 전환을 검토하고 있다. 똘똘 뭉친 미국과 유럽은 푸틴 대통령의 무력을 통한 ‘현상 변경’ 시도를 분쇄하기 위해 러시아 경제의 숨통을 죄는 처절한 제재를 쏟아내는 중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을 “국제적 외톨이”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이번 침공은 ‘신냉전’이라는 말도 무색할 정도로 옛 냉전 시절의 살벌했던 풍경을 단숨에 되살려냈다. 푸틴 대통령은 침공 나흘째인 27일 핵무기 운용 부대에 경계 태세 강화를 지시하며 우크라이나 사태를 핵무기 사용을 둘러싼 미-러 간의 전략 갈등으로 수위를 끌어올렸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래 미-러(당시에는 소련) 간 핵무기 사용 위협이 이렇게 노골적인 적은 없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28일 백악관에서 “핵전쟁 발생 가능성에 우려해야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니다”라며 도발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 대신 캐나다·독일·영국·프랑스 정상 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유럽연합(EU)의 최고위층과 통화했다. 젠 사키 대변인은 “핵무기에 관한 이런 도발적 언사는 위험하다. 오산과 오판의 위험을 높이는 일이며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의 폭주는 유럽의 오랜 지정학적 지형도 단숨에 바꿔버렸다. 독일은 27일 패전 이후 자제했던 군사력 증강 방침을 공개했다. 올라프 숄츠 총리는 이날 국방예산을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으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또 오랜 금기를 깨고 우크라이나에 스팅어 미사일 등 살상무기도 제공하기로 했다. 비슷한 방침을 유지했던 ‘중립국’ 스웨덴도 무기 제공 의사를 밝혔다. ‘중립국 모델’의 대명사인 스웨덴·핀란드는 나토 가입을 위한 논의에 돌입했다. 이에 맞서 러시아의 형제국 벨라루스는 27일 핵무기를 배치할 수 있다는 내용의 개헌을 선택해 핵 공포 부활에 기여하고 있다.
앤절라 스텐트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선임 펠로는 최근 <포린 어페어스> 기고에서 전후 유럽의 안보 질서가 세번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고 밝혔다. 첫째는 전쟁 직후 형성된 미-소 분점 체제, 두번째는 소련이 무너진 1990년 이후 “모두 자유로운 유럽”이었다. 스텐트 선임 펠로는 푸틴 대통령이 옛 소련의 영향권을 부활해 미국·러시아·중국이 각각 영향권을 형성하는 ‘3극 체제’를 만들려 한다고 분석했다. 두 대국과 힘겨운 대결을 해야 하는 미국은 28일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폐기했던 ‘두개의 전쟁’ 독트린의 부활을 암시했다.
푸틴 대통령을 고립시키기 위해 미국 등이 꺼내 든 무기는 경제 봉쇄 조처다. 미국 등은 27일 러시아 은행들을 국제결제망 스위프트(SWIFT)에서 배제한 데 이어 28일 러시아 중앙은행 등과 거래도 금지했다. 주요 다국적 기업들은 잇따라 러시아 사업 철수 계획을 밝혔고, 세계 주요 도시에선 푸틴 대통령을 살인자로 규정하는 시위가 엿새째 이어졌다. 러시아 국내에선 반전 시위로 총 6천여명이 구속됐다. 제재는 문화·스포츠 분야로도 번져 러시아는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퇴출됐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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