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네츠크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의 독립과 주권을 즉각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오래 전에 해야 했던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1일 밤 크레믈에서 발표한 대국민 담화에서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의 친러 무장세력이 만든 ‘자칭’ 두 국가의 독립을 선언하고 출병을 발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러시아는 이번 결정을 분리독립이 선포된 2014년에 할 수 있었고, 그때 하는 것이 더 유리했을 수도 있다. 당시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즉각 합병하면서도 돈바스 지역은 내버려뒀고, 친러 무장세력이 선언한 분리독립도 여태까지 공언하지 않았다.
여기엔 러시아가 돈바스 지역을 서방과의 협상용으로 사용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이곳이 러시아에 계륵같은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흑해 함대 기항지가 있는 크림반도의 경우 지정학적·경제적으로 사활을 걸 가치가 있는 곳이지만, 돈바스 지역은 쇠락한 중공업 지역인 데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계 주민 갈등이 상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로서는 돈바스를 떠안는 것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상당한 비용을 요구한다. 이 때문에 합병보다는 고도의 자치를 보장하는 민스크협정 등을 통해 국제적인 협상 대상지로 만들어 지금까지 유지해왔다. 하지만, 민스크협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사문화된 것이 이번 우크라이나 위기의 한 원인이기도 하다.
돈바스, 소련 중공업의 영광과 쇠락을 대표하는 상징
본래 이 지역의 풍부한 석탄과 철광석 자원은 돈바스를 세계 최대 중공업 지역의 하나로 만든 동력이었다. 돈바스의 최초 도시 루한스크(루간스크)는 러시아가 이 지역을 크림 칸국으로부터 합병한 직후인 1795년 영국인 찰스 개스코네가 금속공장을 세우면서 시작됐다. 도네츠크도 1869년에 영국인 월시먼 존 휴가 철강공장과 석탄 탄광을 열면서 개발됐다. 이곳은 러시아 근대화의 공업적 기반이었고, 소련을 세계 초강대국으로 만든 중공업 복합단지의 상징적인 곳이었다. 도네츠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최고 지도자 이름을 따서 ‘스탈리노’라고 불릴 정도로 소련에는 전략적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과 소련은 이곳을 놓고 지루한 공방전을 벌여 약 3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하지만 도네츠크 등은 소련의 영광인 동시에 몰락의 상징이기도 했다. 돈바스의 중공업은 60년대에 정점을 찍고 점차 쇠락해갔다. 기술과 생산성 혁신이 없는 상황에서 커다란 공장들은 공해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산업이 쇠락하며 도시도 황폐해졌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결정하는 우크라이나 주민투표에서 이 지역 주민의 80% 이상이 찬성했다. 그러나 독립 이후 키예프 정부의 무능과 부패는 돈바스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1993년께 이르자, 산업 생산은 거의 붕괴됐고, 임금은 80%나 하락했다. 심지어 이 지역은 인류가 몰락한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할리우드 영화의 무대로 캐스팅될 정도였다. 이후 돈바스는 꾸준히 자치를 요구해왔다.
1994년 돈바스 지역의 헌법적 지위 등에 관한 주민투표가 치러졌다. 러시아어를 행정부의 공식어로 채택하는 방안, 우크라이나의 독립국가연합(CIS) 가입 및 우크라이나 연방화 등에 대해 이 지역 주민의 90% 이상이 찬성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돈바스 지역의 자치는 주어지지 않았고, 우크라이나어는 유일한 공식어로 남았다. 2004년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권교체인 ‘오렌지 혁명’ 때 돈바스를 포함한 남동부 지역을 자치공화국으로 만드는 ‘남동우크라이나자치공화국’ 출범이 추진되기도 했다.
이 지역의 정치인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2010년 우크라이나의 4대 대통령으로 선출돼 현재의 우크라이나 위기의 씨앗을 만들었다. 취임 이후 경제난에 봉착한 야누코비치는 압력에 밀려서 유럽연합 가입에 합의했다가 이를 번복하며 권좌에서 축출됐다. 우크라이나의 친유럽 노선에 위협을 느낀 푸틴 대통령은 그 직후인 2014년 3월 크림반도를 합병했다. 그와 동시에 돈바스에서 친러 무장세력이 독립을 선언하며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에 참여하는 무장세력들은 옛 소련체제에 향수를 갖는 세력이다. 러시아로부터 온 지원병들도 한 축을 이룬다. 돈바스 주민들은 내전의 와중인 2014년 5월 치러진 주민투표에서 90% 이상이 찬성했다. 이 투표는 물론 분리독립 세력들이 장악한 지역에서 치러진 것이다. 이 세력은 돈바스의 약 3분의 1을 조금 넘는 지역을 통제하고 있다.
돈바스 지역의 인구는 약 350만명이고 이중 우크라이나계가 57% 내외이다. 러시아계는 38% 정도이지만, 러시아어 사용자는 70% 안팎에 이른다. 1930년대 소련은 중공업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며 러시아계 주민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돈바스 지역 전체로는 우크라이나계 주민이 여전히 다수였으나, 러시아어권으로 바뀌었다. 특히, 도시는 배타적인 러시아어권 지역으로 바뀌었다. 분리독립을 추구하고, 내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로 과거 소비에트 체제에 향수를 갖는 세력이다. 러시아로부터 온 자원병들도 한 축을 이룬다. 두 공화국은 분리독립 선포 뒤 스탈린 시대의 헌법을 부활했다. 내전 상황 때문이기도 하나, 돈바스 공화국은 지난 8년 동안 외국인의 방문을 금하는 폐쇄적인 전체주의 체제로 운영됐다. 돈바스 지역에 가족이 있는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방문만 허용된다. 그것도 러시아 지역을 거쳐서 방문해야 한다.
서방의 언론들은 신스탈린주의가 돈바스 공화국들의 이념이라며, 비밀경찰과 수용소가 부활해 시민들을 감시하고 억압한다고 보도한다. 이는 돈바스 공화국들에 대한 직접적인 현지 탐사가 아니라 그 지역을 빠져나온 반체제 인사들의 증언에 따른 것인데, 돈바스 공화국에 대한 평가는 과장된 측면이 있으나, 이 지역이 퇴행적인 과거 체제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내전 발발 1년 뒤 러시아-우크라이나-프랑스-독일 4개국이 합의한 민스크협정으로 휴전과 돈바스 지역에 대한 고도의 자치가 합의됐다. 민스크협정은 제2 민스크협정으로까지 이어졌으나, 현재는 사문화된 상태다. 고도의 자치를 놓고 우크라이나 당국과 분리독립세력 사이의 협상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책임 소재를 놓고 주장이 엇갈리긴 하지만, 우크라이나 정부가 반군쪽인 분리독립세력과 협상을 거부하는 것은 명백하다. 우크라이나는 영토보전성을 주장하며, 돈바스 지역이 우크라이나 내에 남아야 하고, 그 자치도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좌우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정부는 반군과의 협상과 타협으로 지지층 이탈을 우려하고 있다.
두 공화국 내에서는 폭력적인 권력교체가 빈번해, 책임 있는 협상 당사자로서의 입지가 없기도 하다. 2018년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의 알렉산드르 자카첸코 대통령이 식당에서 폭탄테러로 암살당했다. 2015년에는 친러 군벌인 알렉세이 모즈고포이 등 반군 민병대 사령관과 그 지지자들이 잇따라 암살됐다.
우크라이나 내무부는 돈바스에서 약 200명이 숙청으로 사망했고, 이는 러시아 군 정보기관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러시아 및 두 공화국 쪽은 우크라이나 특수부대의 소행이라고 맞선다. 특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두 공화국을 전복하고, 러시아계 주민의 인종청소를 도모하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첨예하게 맞서는 동안 이곳에선 약 2천건의 휴전 협정 위반 사례가 보고됐고, 양쪽의 간헐적인 교전과 포격전으로 1만4천명이 사망했다. 특히, 최근 러시아군이 돈바스 지역에 진입하기 직전인 지난 18~20일 사흘 동안 1100건의 포격 등 폭발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석탄 자원이 풍부한 돈바스를 잃는다면 국민 절반이 겨울 추위에 시달려야 한다. 반면 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러시아로서는 돈바스의 자원이 아니라 이곳을 정치적 완충지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절실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돈바스는 우크라이나 위기의 한 근원이기는 하나, 되려 해결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프랑스와 독일도 민스크협정의 부활이 위기 해결의 첩경이라고 지적한다. 러시아와 서방이 의외로 타협할 지점이 남아 있는 셈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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