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철군이 종료되기도 전에 탈레반이 지난 15일 수도 카불에 무혈 입성했습니다. 이 사태는 우리에게 몇가지 현실들을 말해줍니다.
첫째, 미국과의 20년 전쟁 끝에 탈레반이 승리했습니다. 둘째, 군사력에서 열세인 탈레반이 승리한 것은 결국 아프간 주민 다수가 수동적으로라도 지지했기 때문입니다. 탈레반은 여성에게 근대적 교육이나 사회활동을 불허하는 등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에 바탕한 반근대적인 공포통치를 펼쳤던 집단입니다. 이런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한 것이 주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 많은 주민들이 여전히 탈레반을 반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이 아프간과 그 주민들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 또한 부정하기 힘듭니다. 탈레반은 아프간 주민에게 최선일 수 없고, 기꺼해야 차악일 뿐입니다. 이는 결국 탈레반이 지난 40년간 계속된 아프간에서의 전쟁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탈레반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 그런 객관적 현실을 이해해야만 아프간과 탈레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논썰】 탄생에서 몰락, 그리고 재집권까지…탈레반의 모든 것
탈레반은 어떻게 탄생했나
‘탈레반’이라는 말은 아프간 최대 민족인 파슈툰 족의 단어로, ‘학생’ 혹은 ‘추구자’라는 뜻입니다. 파슈툰족 부족 사회의 이슬람학교인 마드라스의 이슬람 신학생, 혹은 이 학교를 나온 뒤 전통 마을에서 이슬람 말단 성직자로 종교 의례를 집전하거나, 이슬람법인 샤리아에 따라서 일상사를 중재하던 계층이었습니다.
아프간의 비극이 시작된 1979년 12월24일 소련군의 아프간 진주는 이들 탈레반의 운명도 바꿔 놓았습니다. 소련군의 진주에 앞서 1978년 아프간에서는 친소련 사회주의 성향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소비에트 스타일의 사회주의 체제를 선포했습니다.
사회주의 정권은 근대화에 낙후된 봉건적인 아프간에 급진적인 개혁을 도입합니다. 여성에 대한 문맹타파 운동으로 여성의 공교육을 의무화하고, 신부 지참금 폐지, 혼인의 자유를 선포했습니다. 특히 부족 원로와 이슬람 율사들이 통제하던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배분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했습니다.
사회주의 정권의 급진적 개혁은 전통적인 부족사회 체제를 해체하는 것이었고, 그 안의 부족 원로나 이슬람 율사 등 기득권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프간은 당시 사회주의 정권의 그런 급진적 개혁을 뒷받침할 세력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은 사회주의 정권에 대한 대대적인 불만으로 폭발해, 시위와 봉기에 이어 반란 상황으로까지 치달았습니다. 여기에 사회주의 정부 내의 정권 투쟁, 반사회주의 정치세력들의 반대까지 겹치고, 군부 내에서도 반란이 일어나면서 사회주의 정권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에 소련은 자신들이 후원한 아프간의 사회주의 정권 유지를 위해 군을 파견해 개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련군의 진주는 아프간 주민들의 정권 반대 투쟁을 아프간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대외 투쟁으로 성격을 변화시켰습니다. 여기에 미국과 파키스탄이 개입하면서 아프간에서는 대리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냉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당시 미국은 아프간에서 친소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될 때부터 아프간의 공산화를 우려했습니다. 반사회주의 정권 운동이 벌어지자 이를 지원하는 개입을 시작했습니다. 인근 파키스탄도 경쟁국인 인도와 우방국인 소련이 아프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면 자신들의 안보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판단에 미국과 손잡고 아프간 개입에 적극 나섭니다.
이런 미국 등 외부의 지원으로 아프간 내의 반소련 투쟁은 ‘무자헤딘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무자헤딘이란 ‘성스런 전사’라는 뜻으로, 이슬람의 대의를 관철하는 성전, 즉 ‘지하드’를 수행하는 전사라는 뜻입니다. 아프간 내의 반소련 투쟁을 수행하는 이들은 무자헤딘으로 명명됐고, 이 투쟁은 아프간의 주권 보호 투쟁을 넘어서 ‘범이슬람’ 세계에서 지하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따라서 아프간 내 주민뿐만 아니라 아랍 등 이슬람 세계에서 무슬림들까지 참전하게 됐습니다. 아프간과 아랍 세계의 무슬림들을 아프간으로 참전시키는 데 미국은 총기획을 하고, 사우디는 돈을 대고, 파키스탄은 그들을 훈련시키고 아프간으로 투입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운동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라덴입니다. 빈라덴 등 당시 이슬람주의자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고 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나중에 알카에다를 결성하고, 이슬람 세계 각국으로 돌아가 이슬람주의 무장투쟁을 주도하고, 결국 9·11 테러 등 대규모 국제 테러를 벌이게 됩니다.
【논썰】 탄생에서 몰락, 그리고 재집권까지…탈레반의 모든 것
탈레반은 왜 ‘잔혹’의 대명사가 됐나
이 무자헤딘 운동의 한 대열에 참여한 것이 전통 마을의 하위 성직자들인 물라 및 마드라스 신학생 등 탈레반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한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총을 들고 소련군에 맞서는 가장 헌신적이고 용감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지역의 물라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던 이슬람 학교 마드라스와 그 학생들을 무자헤딘 운동으로 이끌었습니다.
소련은 결국 무자헤딘 운동에 밀려 1989년 철군하게 됩니다. 무자헤딘 투쟁에 참가했던 물라들과 이슬람 신학생들은 총을 내려놓고 마을과 학교로 돌아갔으나, 아프간에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 정권이 여전히 남았고, 무자헤딘 운동에 참가했던 이들끼리의 권력투쟁이 벌어졌습니다. 사회주의 정권 타도 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무자헤딘 사이에서도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1992년 사회주의 정권은 무너지고, 임시정부가 수립됐으나 본격적으로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1994년 봄 칸다하르에서는 50여명 정도의 소규모 민병대가 결성됐습니다. 마을과 학교로 돌아갔던 젊은 물라들과 마드라스의 신학생들이 모여서 질서 회복과 이슬람 교리의 실천을 내세웠습니다. 이들은 지도자로 가장 독실하고 개인적 야망이 없는 당시 39살의 물라인 모하메드 오마르를 추대했습니다. 빈농 출신인 그는 무자헤딘 운동 때 4번이나 부상당해 한 눈을 실명한 헌신적인 무자헤딘이었습니다.
오마르와 동료들은 풍부한 전투 경험에 더해 내란으로 도탄에 빠진 아프간에 순수한 이슬람 통치를 구현하려는 기강과 이념을 가졌다는 점에서 기존 군벌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탈레반은 군벌들의 횡포를 시달리는 칸다하르 지역의 상인들의 호소를 받고는 이 지역의 소규모 군벌들을 척결하는 과감한 공격으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탈레반은 빈한한 출신의 고지식한 촌뜨기들이었으나, 상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들의 주도로 끌고 가는 단호한 투사들이기도 했습니다. 아프간의 현실에 천착한, 노련하고 교활하기까지 한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도시와 도시를 잇는 간선도로 지역을 먼저 점령하려 했던 과거 소련군이나 군벌들과는 달리, 농촌과 황야의 마을과 부족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장악했습니다. 대부분 무력을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슬람 통치를 구현하는 데 협력을 요청하면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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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은 어떻게 막강한 힘을 키웠나
칸다하르 지역에서 탈레반의 두각은 곧 파키스탄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아프간에서 영향력 유지하려는 파키스탄은 아프간의 통제할 수 없는 무질서를 바로잡고, 중동과 중앙아시아로 가는 교역로 등을 정비하려고 했습니다.
무자헤딘 운동을 지원한 중추 기관이던 파키스탄 군정보부(ISI)는 1994년 10월 무자헤딘들을 지원하려고 접경 지역에 숨겨뒀던 1만8천정의 에이케이(AK)-47 소총과 120대의 대포 등 대량의 무기를 지원했습니다. 탈레반은 이 무기들을 받으면서 즉각 수만명을 무장할 수 있는 막강한 집단으로 순식간에 변합니다.
1996년 4월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는 칸다하르의 가장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가 입었다는 전설의 외투를 걸치고는 카불 진공 작전을 공포했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뒤인 9월27일 탈레반은 카불에 입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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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의 득세는 아프간의 부족사회에는 그들의 전통적 자치뿐만 아니라 나름의 공정한 사법체계를 의미했습니다. 아프간 주민에게는 전란이 뿌린 무질서에 대한 유일한 선택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이슬람 교리에 따른 사회 운영과 통치를 꿈꾸었습니다. 세력이 성장하면서 이들은 자신들을 묶어줄 강력한 정체성이 더 필요해졌고, 이는 코란에 적힌 이슬람 교리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실행하는 쪽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들은 아프간의 비극이 세속의 물질주의에 기초한 서방의 가치를 강제하려다 발생한 것으로 보고 그에 대한 강력한 반동으로 치닫게 됩니다.
카불에 설치된 탈레반 종교경찰의 청사에는 “이성은 개들에게 던져줘라”라는 구호가 나붙었습니다. 아프간에서 사회주의 건설 시도 등 인간의 이성에 기댄 시도들이 참혹한 실패로 끝나자, 신의 섭리와 의지로 회귀하려는 극단적 반동화가 나타난 것입니다. 탈레반의 집권과 함께 소녀들의 등교, 여성 공무원들의 해고 등 여성의 사회활동이 금지되는 등 극단적인 보수적 이슬람화가 진행됐습니다. 심지어 선지자 무함마드가 식물 뿌리를 사용해 이를 닦았다며, 현대적 치약도 금지되는 실정이었습니다.
탈레반의 이런 통치가 가능했던 이유는 아프간이 당시 소련과의 전쟁에 이은 내전으로 모든 사회기반시설이 파괴된 사회였던 점도 있습니다. 그런 여건에서 탈레반은 카세트테이프, 치약 사용 금지 같은 반근대적 공포통치를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근대화의 혜택을 향유했던 도시 지역의 중산층 이상이나 여성들에게 탈레반의 반근대적 종교이념과 공포통치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 여성뿐만 아니라 시아파 등 다른 종파, 하자르족 등 소수민족에 대한 박해도 탈레반에 대한 반대를 키웠습니다.
탈레반 정권은 왜 순식간에 붕괴됐나
탈레반이 카불로 진공하던 1996년 봄 알카에다 수장 빈라덴이 아프간을 찾아와 망명처를 구했습니다. 탈레반의 품에 안긴 알카에다는 1998년 8월 아프리카 케냐의 나이로비와 탄자니아의 다스에스살람의 미국 대사관에서 동시에 폭탄 테러를 감행해, 200명 이상이 숨지고, 4천명 이상이 부상했습니다. 미국은 아프간에 은신한 빈라덴을 겨냥해 크루즈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으나, 빈라덴은 살아남았습니다. 이 미사일 공격은 탈레반을 강경한 반미로 돌아서게 해서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관계를 더욱 밀착시켰습니다.
결국 빈라덴의 알카에다는 2001년 9·11 테러를 감행했고, 이는 미국에 알카에다를 품어주는 탈레반 정권을 타도하려는 아프간 침공으로 이어졌습니다.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테러를 저지른 자들이나, 그들을 숨겨준 이들은 구분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9·11 테러 한달이 지나지 않은 10월7일 아프간에 대한 미군의 공습이 시작됐습니다. 미국은 300명의 지상군 병력 및 110명의 중앙정보국(CIA) 군사요원만 파견하고, 현지의 반탈레반 북부동맹군을 앞세워 카불로 진공했습니다. 미 공군력의 정밀 지원도 가세했습니다. 탈레반 병력들은 추풍낙엽처럼 쓸려져 나갔고, 한달 뒤인 11월13일 카불이 함락됐습니다. 탈레반 정권은 붕괴됐고, 지도부와 대원들은 파키스탄 접경지역으로 도주했습니다.
탈레반 정권이 순식간에 몰락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민들이 등을 돌렸습니다. 도시의 중산층은 물론이고 농촌 지역 주민들도 탈레반이 집권한 뒤에 더 악화된 민생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미국의 침공에 아프간 주민들은 새로운 기대를 품었습니다.
군사적으로 탈레반의 패주는 당연했습니다. 게릴라인 탈레반이 ‘정부군’으로 변하면서 막강한 화력과 공군력을 갖춘 미군에 맞서 정규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탈레반은 어떻게 기사회생할 수 있었나
하지만 탈레반 대원의 대다수는 단지 집으로 돌아갔거나, 파키스탄 등으로 숨어버렸을 뿐이었습니다. 지도부와 핵심 대원들은 그들이 성장했던 파키스탄의 접경지대나 발루치스탄 지역으로 숨어들었고, 무장병력을 구성했던 대원들도 칸다하르 등 고향의 집으로 돌아가 무기를 집에 숨겨놓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파키스탄은 탈레반의 완전한 제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파키스탄 군정보부는 탈레반 지도부를 퀘타 등 대도시에서 안전하게 숨겨줬습니다. 탈레반들은 파키스탄에서 다시 마드라스 학교를 열어 새로운 세대의 탈레반 대원들을 양성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미국이 실수를 했습니다. 9·11 테러 직후부터 이라크 침공에 눈독을 들였던 미국은 아프간 침공의 목적인 알카에다와 빈라덴 제거에도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카불 입성 한달 뒤인 12월초 미군은 파키스탄 접경 지역인 토라보라에서 빈라덴을 코앞까지 추격했다가 놓쳤습니다. 토라보라 전투를 지속하려면 추가 병력 투입이 필요했으나, 미국 지도부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라크 전쟁 준비에 정신이 팔려서 아프간에 병력이 더 묶여 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탈레반 붕괴 이후 아프간 주둔 미군은 6천명으로 축소되는 등 전쟁 자원은 이라크로 몰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소련 침공과 내전 등으로 20년 이상 전쟁에 지친 아프간 주민에 대한 지원은 1인당 연평균 60달러(약 7만원) 정도였고, 이마저 40%는 원조 공여국의 현지 사무실 비용이었습니다. 아프간은 2차대전 뒤 미국이 지원한 국가 재건에서 가장 적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미국도 도시 중심의 통치와 지원을 했습니다. 농촌 주민들은 전쟁 때 주 수입원이던 양귀비 재배에 다시 기댔고, 미국과 아프간 정부는 이를 박멸하려 했습니다. 양귀비 재배를 주 수입원으로 하는 탈레반이 돌아올 여건이 마련된 것입니다.
“당신들은 시계를 갖고 있으나, 우리는 시간을 갖고 있다”. 2006년 2월 로널드 뉴만 당시 카불 주재 미국 대사는 본국에 보내는 비밀 외교전문에서 탈레반 지도자의 경고를 전하며 탈레반이 귀환하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워싱턴 지도부는 탈레반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믿고 싶어하지도 않았습니다.
【논썰】 탄생에서 몰락, 그리고 재집권까지…탈레반의 모든 것
대사의 경고대로 2006년에 탈레반을 중심으로 한 아프간 반군들의 자살 테러는 123건으로, 전년의 17건에 비해 7배가 넘게 급증했습니다. 사제폭탄 공격은 두 배로, 연합군에 대한 공격은 세 배로 늘어서 사망자는 100명에 달했습니다. 2007년 들어서 2월27일 아프간 주둔 미군의 상징인 바그람 기지에서 차량 폭탄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이날 비밀리에 아프간을 방문해 이 기지에 머물다가 카르자이 대통령을 만나려고 나가던 딕 체니 부통령을 겨냥한 테러였습니다. 이 사건은 탈레반이 바그람 기지 등 아프간의 모든 사정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다는 신호였습니다. 그해 7월 한국의 기독교단기선교단 23명이 탈레반에게 납치돼, 2명이 숨지고 43일이나 억류됐다가 풀려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탈레반은 연합국의 일원인 한국과 공식협상을 벌이며, 자신들의 귀환을 공식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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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의 재집권은 어떻게 가능했나
2009년 취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공약인 아프간전 승리를 위해 그해 12월 병력 증강을 발표했습니다. 2007년 이후 늘어나 이미 7만명에 달하는 미군 병력을 10만명 이상으로 증강하는 발표였으나, 오히려 초점은 자신의 임기 만료 전인 2013년에 철군을 시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철군을 위한 조건을 조성하려는 병력 증강이었습니다. 이는 탈레반과의 협상을 의미했습니다.
【논썰】 탄생에서 몰락, 그리고 재집권까지…탈레반의 모든 것
2020년 2월29일 미국과 탈레반 사이에서 도하 평화협정이 타결됐습니다. 미군 등 외국군을 아프간에서 14개월 이내로 완전 철군하고, 탈레반은 아프간을 알카에다 등의 기지로 활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뼈대였습니다. 탈레반과 아프간 정부 사이의 추가 협상도 규정됐으나, 그 후부터 사실상 백지화됐습니다. 철군 일정은 지켜지지 않았고, 탈레반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떠나기만을 기다리는 미군을 무시한 채 공세를 확장했습니다.
2021년 취임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결국 지난 4월14일 아프간에서 미군 철군을 9월11일 이전에 완료한다고 못박았습니다. 지난 7월2일 미군은 아프간 최대 기지인 바그람 기지에서 야반도주하듯 철수했습니다. 아프간 정부에도 통보하지 않았고, 미군이 철수한 뒤 기지는 아프간 주민들에 의해 약탈됐습니다. 5월 이후 공세를 시작한 탈레반은 8월 들어서 9개의 주도를 장악하는 한편 국토의 60%를 차지한 상태였습니다. 이때부터 탈레반은 주요 도시들을 거의 무혈입성하다가 지난 15일 순식간에 카불로 입성했습니다.
아프간 정부군은 만연한 부패에다가 미군 철수 이후 지원이 끊기면서 스스로 붕괴됐습니다. 병력이 30만명이라고 하나 사실 월급만 받으려고 이름만 올린 허수였고, 실제 병력은 6만명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무엇보다도, 미국은 아프간 정부군을 미군처럼 싸우게 하려고 무장하고 훈련시켰습니다. 이는 현대적인 보급과 장비, 지원이 필요합니다. 미국이 철수하자, 이런 현대적 군비 운용이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반면 탈레반은 AK-46 소총과 총류탄, 그리고 도요타 픽업트럭으로 상징되는 단촐한 무장과 기동력으로 전천후적인 전투 능력을 보였습니다.
“25년 전과 다르다” 탈레반 약속 믿을 수 있을까
탈레반은 카불 입성 뒤 여성의 사회활동을 보장하고, 아프간의 모든 민족과 부족, 세력들이 참가하는 ‘포용적인 신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혼란이 계속되기는 하나, 실제로 탈레반은 아프간을 떠나려는 외국인과 그 협조자들의 출국을 허용하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논썰】 탄생에서 몰락, 그리고 재집권까지…탈레반의 모든 것
25년 전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했을 때 아프간은 소련과의 전쟁에 이은 내전으로 모든 사회기반시설이 파괴된 사회였습니다. 그런 여건에서 탈레반은 카세트테이프, 치약 사용 금지 같은 전근대적 공포통치를 실시했습니다. 그 이후로 한 세대 이상이 교체된 탈레반은 이제 카불에 입성해 소셜미디어를 통해 선전·선동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등이 수조 달러를 쏟아부어 재건한 사회기반시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탈레반이 여성의 공직을 허용하겠다고 밝힌 것이 단순한 쇼라고 해도, 그들의 달라진 상황 인식을 반영합니다.
탈레반의 원자료들을 수집한 <탈레반 읽기>(The Taliban Reader)라는 기념비적인 연구자료를 펴낸 펠릭스 쿠언 등 연구자들은 “2001년 이후 탈레반이 원하는 것을 그들이 2001년 이전에 원했던 것에 기반해 추론하는 것은 그 운동과 목적에 극히 잘못된 시각으로 이끌 것”이라며 “탈레반 운동은 진화 중인 운동”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논썰】 탄생에서 몰락, 그리고 재집권까지…탈레반의 모든 것
탈레반이 정말로 달라졌는지, 앞으로 어떤 진화의 모습을 보여줄지는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다만 여성 등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과 박해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 40년 이상 계속된 아프간 전쟁 수습이 탈레반의 어깨 위에 놓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프간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의 완전한 종식입니다. 탈레반이 표방하는 대로 ‘포용적 정부’를 구성해 전후 재건에 나서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사회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관여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프간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과 소수자들의 인권과 권리를 확대하는 근본적인 방법입니다.
모든 책임을 탈레반에게 물어서 악마화하고, 바이든 대통령의 철군 결정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또다시 ‘반탈레반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것은 아프간을 벗어나려거나 남으려는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탈레반에 대해 비판과 견제를 하면서도, 아프간을 돕기 위한 우리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연출·편집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도움 채반석 기자 chaib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