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 저널>이 26일 일본의 급진적 완화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며 이에 대한 분석 기사를 실었다. <월스트리트 저널> 누리집 갈무리
일본이 버블 경제 시기였던 1980년대 시바타 히로미는 월급 전부를 캐시미어 코트 1벌을 사는 데 쓴 적이 있다. 그러나 도쿄에 사는 26살 딸 나나코는 엄마와는 정반대다. 옷을 거의 사지 않고 일본 중부 시즈오카시에 있는 엄마 집의 옷장을 뒤져서 입을 만한 옷을 가져간다. 1990년 이후 계속되고 있는 일본 디플레이션은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간의 소비 습관을 바꿔놓을 만큼 강력하고, 일본 정부의 대규모 완화정책에도 바뀌지 않고 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이 26일 전했다.
이 신문은 ‘일본의 급진적 완화정책의 실패’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 정부의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이 디플레이션에 익숙해진 일본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이런 현상은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다른 나라에도 교훈을 주고 있다고 했다.
1980년대 버블 경제 시대에만 해도 일본이 디플레이션에 시달리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돈이 넘쳐났던 일본 대기업들은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 등 값비싼 국외 부동산을 사들였고, 수도 도쿄의 부동산 가격은 세계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1989년 일본 정부가 경기 과열을 막기 위해서 금리를 올리면서 거품은 터졌고, 이후 일본 경제는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연 평균 경제성장률은 1%정도 수준에 그쳤고 물가는 계속 하락했다. 지난해 일본 빙과 업체인 아카기유업이 자사 대표 아이스크림 가격을 25년만에 10엔(약 100원) 올리면서 대국민 사과 광고를 내보낸 적도 있다.
일본 정부는 디플레이션을 벗어나기 위해서 세계에서 가장 과감한 금융정책들을 펼쳐왔으나,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디플레이션은 끝나지 않고 있다.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1999년 기준금리를 제로(0)에 근접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유럽연합과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야 초저금리 정책을 펼쳤다.
양적완화 정책도 일본이 원조다. 일본은행은 2001년부터 양적완화 정책을 시행했고, 지난해부터는 장·단 금리 조작를 덧붙인 양적·질적 금융완화까지 실시하고 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2013년 취임 이후 양적완화 규모가 한해 7000억달러(약 790조원)까지 늘어나자, 일부 투자자들은 하이퍼인플레이션과 자산 거품을 우려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가상승률 2%를 목표로 내걸었던 구로다 총재는 지난해 11월 목표 달성을 연기한다고 했다.
디플레이션이 경제에 치명적인 이유는 기업은 경제 상황 악화를 예상해 투자와 고용을 줄이고, 소비자들도 소비를 따라서 줄이는 악순환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 젊은이들은 디플레이션 세계만을 경험하며 자랐기 때문에, 소비를 촉진하려는 일본 정부의 금융정책이 잘 먹히지 않는다고 신문은 지적했다.
20살부터 34살까지 2000만 일본 젊은이들은 오늘보다 내일 물건 값이 싼 세계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안전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집을 여러 명이 함께 써서 임대료를 낮추고 식사는 3달러짜리 저렴한 것으로 해결한다. 신문은 일본 젊은이들이 소비다운 소비를 하는 것은 ‘여행’ 정도라고 전했다. 쇼핑은 내일이면 가치가 떨어지지만 여행으로 얻은 경험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남부 가가와현에 사는 30살 공무원 가메야마 게이타는 결혼을 하기 위해서 연봉 4만달러(약 4520만원) 중 25% 가량을 저축한다. 부모 집에 살고 쇼핑을 거의 하지 않고 돈을 모아서, 0.05% 이자 밖에 주지 않는 은행에 저축을 한다. 가메야마는 “(일본은행이) 사람들이 돈을 쓰게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내가 지갑을 열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자가 싸다고 해서 창업자들이 돈을 쉽게 빌리지도 못한다. 33살 사이토 다카시는 2015년 온라인으로 옷을 빌려주는 사업을 하기 위해서 국책 금융기관인 일본정책금융공고에 20만달러(약 2억2000만원) 대출을 신청했다. 여러 절차를 거친 뒤 사이토는 5만달러(약 5700만원)만 대출 받을 수 있었다. 1년 뒤 사업이 성장하자 사이토는 추가 대출을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은행권 분석가들은 일본 은행들은 보수적이고 특히 스타트업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한 경향이 있다고 했다. 금리가 낮기 때문에 수익이 적은 점도 일본 은행들의 보수화의 요인이다.
엄마 옷장을 뒤지던 시바타의 딸 나나코는 일하는 시간을 최근 일주일에 사흘로 줄였다. 노동시간이 줄어서 수입도 줄었다. 수입 절반을 도쿄 아파트 임대료로 내야 한다. 쇼핑은 완전 중단했다. 나나코는 직업 경력에 시간을 투자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노동시간을 줄이는 대신 최근 현대무용을 배우고 있다. 나나코는 “내가 회사에서 완전히 소비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우리 세대는 (임금) 상승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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