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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는 왜 파산했나?

등록 2015-02-15 19:54

그리스는 글로벌 금융위기 뒤 긴축정책을 시행했으나 국가부채가 더 늘어나고 실업자와 빈곤층이 급증하는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 사진은 지난 12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한 남자가 구걸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AFP 연합뉴스
그리스는 글로벌 금융위기 뒤 긴축정책을 시행했으나 국가부채가 더 늘어나고 실업자와 빈곤층이 급증하는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 사진은 지난 12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한 남자가 구걸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AFP 연합뉴스
[경제의 창] 열려라 경제
돈은 앉아서 빌려줬다가 서서 돌려받는다고 했다. 그리스를 둘러싼 유럽의 줄다리기가 딱 그 모양이다. 지난달 선거를 통해 집권한 그리스의 새 정부가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맺었던 약속들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있다. 국유자산 매각 계획을 일부 무효화했고, 해고 공무원 복직과 연금 인상을 약속했다. 채권국들에는 빚을 깎자고 요구하는 중이다. 긴축을 강제하는 기존의 프로그램은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돈 빌려준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동시에 당혹스럽기도 하다. 겉으로는 ‘유로존에서 쫓아낼 수도 있다’고 위협하지만, 그랬다가는 자신들 역시 거덜이 날 지경이어서 해법을 찾느라 분주하다. 이래저래 빌려주고 물리고 한 돈이 3300억유로, 우리 돈으로 413조원에 이른다.

나 몰라라 하는 듯하지만, 그리스도 할 말이 많다. 위기를 맞고 난 뒤로 겨우 5년 사이에 경제 규모가 4분의 1이나 쪼그라들었다. 실업자는 약 2.5배로 90만명가량 폭증했다. 대공황의 참상이 따로 없다. 이른바 트로이카(유럽연합·국제통화기금·유럽중앙은행)가 짜준 경제 프로그램을 가동했는데도 형편은 계속 더 나빠져갔다. 빚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국가부채를 갚으려면 전 국민이 1년9개월 동안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다 내주어야 할 지경이다. 지금으로선 상환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 재무장관이 말했듯이 국가경제는 이미 파산한 상태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가 살고 채권국들도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 무슨 수로 그리스를 회생시켜낼 것인가?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는 왜 파산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그리스 경제는 두 번 무너졌다. 한 번은 그리스 자신의 잘못이다. 또 한 번은 트로이카의 실책 때문이다.

문제 핵심고리는 높은 물가
2000~2008년 32% 급등
집값 53% 뛰며 주거비 올려
권력·기득권층 부패도 원인

긴축으로 물가·임금 낮췄지만
세수 급감으로 나랏빚 더 늘어
빈곤층 급증 따라 정치 불안 고조
긴축 외에 ‘개혁’ 필수
경쟁 촉진하고 생산성 높여야

그리스의 문제를 두고 일각에서는 형편에 맞지 않게 빚내서 즐긴 탓이라고 지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독일의 단위노동비용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그리스의 그것은 27% 급증했다. 경쟁이 될 리가 없다. 독일의 물건은 상대적으로 더 싸지고, 그리스의 물건은 더 비싸졌다. 그리스의 적자는 늘어났고 독일에서 더 많이 빌려 써야 했다.

그러나 반드시 노동자들의 탓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스의 단위노동비용은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속도로 올라 생산성 향상의 보상조차 받지 못했다. 높은 노동비용의 원인은 높은 물가에 있었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독일의 물가가 16% 오르는 동안, 그리스는 32%나 상승했다. 2010년 이후 3년간 그리스의 단위노동비용이 7%가량 추락하는 와중에도 그리스의 물가는 9%나 더 올랐다. 그리스의 인플레이션에는 인건비가 아닌 다른 구조적인 문제가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중 하나는 부동산 거품이다. 금융위기 이전인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독일의 주택 가격이 13% 떨어지는 동안 그리스의 집값은 53%나 뛰었다.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드는 주거비용의 격차가 그만큼 벌어졌다는 의미다. 또 하나의 배경은 부패다. 권력과 결탁한 소수의 기득권 집단이 가만히 앉아서 거대한 자릿세를 뜯어먹었다. 경쟁자의 진입을 차단하고 물가를 구조적으로 끌어올렸다. 정권이 누구로 바뀌든 달라질 게 없었다. 한패였기 때문이다. 위기 이후 그리스의 집값이 노동비용과 함께 폭락하는 와중에도 그리스의 물가가 계속 오른 이유다.

그리스 문제의 핵심 고리는 인플레이션이다. 과거 유럽에서는 이런 경우 평가절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왔다. 그러면 외화로 표시된, 노동비용을 포함한 그 나라의 모든 가격이 단번에, 무차별적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평가절하를 한 위기 국가는 신속하게 경쟁력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제는 단일 통화, 고정 환율을 사용하는 유로 시스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 채권단 ‘트로이카’는 그리스에 ‘내부적인 평가절하’를 요구해왔다. 대대적인 긴축을 통해 물가와 임금을 대대적으로 떨어뜨리게 했다. 실업자가 폭증하면서 자연히 소기의 성과(?)가 나타났다. 그리스의 단위노동비용은 2013년까지 4년간 13% 낮아졌다. 2013년 이후로 소비자물가도 결국 2% 떨어졌다.

그러나 이 디플레이션 해법은 더 큰 문제를 낳았다. 경제가 쪼그라들면서 세금 수입이 격감했다. 재정수지가 악화되면서 나랏빚은 더 늘어났다.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부채의 비율은 대폭 높아져 상환능력을 상실했다. 분모와 분자가 동시에 악화된 탓이다. 실업을 양산하고 연금을 삭감하자 빈곤층이 급증했다. 이로 인해 정치 불안이 극도로 고조됐다. 그 결과로 등장한 것이 ‘극좌 세력’이라고 불리는 그리스의 새 정부다.

우리는 그리스 위기를 통해 물가안정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됐다. 물가를 안정시키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수요를 제약하는 것이다. 긴축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사례는 긴축만이 능사는 아니며, 너무 오래 과도하게 이뤄질 경우 큰 부작용을 낳는다는 걸 보여줬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교조적인 위기 해법이 일으키는 문제는 우리도 절감한 적이 있다.

물가를 안정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은 경쟁을 촉진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다. 개혁이다. 소수의 기득권자들이 자원을 독과점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긴요하다. 시장 진입이 쉬워지고, 부실한 요소의 퇴장이 원활해지면 물가안정 속에서 경제는 고르게 성장한다. 그리스의 위기를 낳았던 첫번째 문제는 긴축을 통해 해소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개혁이다. 그러니 개혁은 긴축의 반대말이 아니며, 부양의 동의어도 아니다. 그리스 새 정부의 방향도 외견상으론 그렇게 맞춰져 있다.

그러나 돈을 빌려준 사람의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 긴축을 거부하겠다는 주장은 마치 과거처럼 신나게 빚을 내서 쓰겠다는 말로 들리기 십상이다. 진정성과 신뢰가 필요하다. 그게 그리스 사태 해결의 실마리다. 그리스의 새 정부는 아직 그 근거를 제공하지는 못하고 있다.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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