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로존(유로를 사용하는 19개국)을 여행한 사람들은 유로가 무척 싸졌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유로는 12일 기준으로 1유로당 1250원대로 2011년 9월 1620원대까지 치솟았던 데 견주면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유로 하락 추세는 달러 대비로 보면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 유럽중앙은행(ECB)이 매월 600억유로에 이르는 양적완화를 발표한 뒤인 지난달 23일 1유로는 1.1198달러로 1.2달러 선이 붕괴돼 11년 만에 가장 낮은 가치를 기록했다. 유로 가치는 이후 다소 회복세를 보이고 있으나 달러 강세와 유로존 양적완화, 그리스 경제 불안이 겹쳐 추세적으로는 하락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세계 금융가에서는 1유로가 1달러와 가치가 같아진다는 뜻인 ‘패리티’(parity·동등성)의 시대가 올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영국 바클레이스은행은 최근 ‘올해 안에 패리티의 시대가 온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바클레이스는 1유로의 가치가 6월에 1.08달러, 9월에 1.05달러로 내려갔다가 연말에는 패리티 상태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도 바클레이스와 시기 차이만 있을 뿐 2017년에 패리티가 온다고 전망했다. 심지어 2017년 말에는 유로 가치가 달러 가치를 밑돌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로가 달러와 가치가 같거나 그보다 낮은 시기는 출범 초기인 2002년을 빼고는 없었다. 2008년 벌어진 세계 금융위기나 2012년 유럽 재정위기 때도 유로는 달러보다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패리티는 유로 가치의 하락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다. 유로존 내부에서도 경기 침체의 타격이 심한 남유럽 국가들은 수출 경쟁력 등을 끌어올릴 수 있는 패리티를 공개적으로 바라고 있다.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는 지난달 21일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패리티는 나의 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달러보다 유로 싸질 것” 전망도
너도나도 환율 조정 악순환 우려
패리티 현상은 세계 환율전쟁을 격화시킬 우려가 있다. 지난달 유럽중앙은행의 양적완화 발표 뒤 스웨덴 중앙은행이 마이너스 기준금리를 채택한 일을 비롯해 세계 10여개국의 중앙은행이 경쟁적으로 기준금리를 내렸다. 미국은 유로존과 일본이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완화적 통화정책을 사용하는 데 대해 아직까지는 용인한다는 분위기지만, 환율전쟁 격화로 경기 회복이 둔화되면 고민에 빠질 수 있다.
영국 <가디언>은 “미국 의회는 수입물품 가격 하락으로 인한 타격을 막기 위해 행정부에 관세 등으로 수입물품 가격 조정에 나서라는 압력을 넣을 수 있다. 또 재닛 옐런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달러 가치 상승을 막기 위해 기준금리 인상을 유보하라는 압력에 직면할 수 있다”고 짚었다. 지난 10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장 회의에 참석한 제이컵 루 미국 재무장관은 “어떤 나라도 환율을 수출을 증가시키는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1930년대 대공황 때 세계 각국은 경쟁적으로 수입 장벽을 높이는 보호주의 정책을 펴, 대공황의 피해가 더욱 심각해지는 상황에 직면했다. 데이비드 우 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 애널리스트는 “공표하지는 않아도 이미 환율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이 시장의 공통된 인식”이라며 “통화 가치가 떨어지면 해당 국가는 단기적으로 경기가 살아날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게임을 하면 세계 무역 전체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조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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