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석유산업 지역 자본
투자처 잃고 주택시장으로
자동차 매입·운행 늘기도
유류할증료·난방비 등 하락
소비·경기 활성화 기대감
투자처 잃고 주택시장으로
자동차 매입·운행 늘기도
유류할증료·난방비 등 하락
소비·경기 활성화 기대감
#1. 국제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넘나들던 2012년 봄, 미국 동부 필라델피아에 사는 마커스 벤슨(28)은 집에서 2400㎞나 떨어진 중북부 노스다코타주의 셰일가스 업체에 취직했다. 시급 8달러의 허드렛일까지 했던 그에게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올해 새해 첫날 해고 통보와 함께 끝났다. 벤슨은 <시엔엔>(CNN) 방송에 “회사 쪽은 유가 하락이 (해고의) 주된 이유라고 밝혔다”고 말했다. 셰일가스 업계는 고유가 시대의 유망 산업으로 각광받다가 유가 폭락의 날벼락을 맞았다.
#2. 캐나다 동쪽 끝, 인구 1만명의 마을인 애머스트의 주민들도 국제유가 폭락의 영향을 절감하고 있다. 주유소 겸 잡화점을 운영하는 셜리 시퍼(55)는 지난 13일 현지 신문에 “유가가 떨어지면서 운전자들이 기름을 더 많이 채운다”며 “손님들이 다른 물건도 많이 사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근 몇달 새) 주유비가 일주일에 25~30달러, 한달이면 최소 100달러가 절감돼요. 어떤 사람들에겐 엄청난 차이죠.”
국제유가의 날개 없는 추락이 ‘얻는 자’와 ‘잃는 자’의 명암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국가와 기업은 물론이고, 전세계 소비자들도 한동안은 ‘저유가 시대와 함께 살아가기’에 익숙해져야 할 판이다. 유가 폭락은 ‘양날의 칼’이다. 산유국과 석유자본, 주요 에너지 기업들은 울상이다. 반면, 석유산업 관련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소비자들은 저유가의 덕을 볼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저유가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 신규 유전의 탐사·개발에 공백이 생기면서 장기적으론 또다시 유가 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러나 아직은 미래의 시나리오일 뿐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폭락하기 시작한 국제유가는 좀체 반등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 12일 영국 런던 선물시장에서 2월 인도분 브렌트유는 배럴당 47.4달러로, 지난해 9월 초 배럴당 100달러 선이 무너진 지 4개월여 만에 반토막이 났다. 2009년 1월 배럴당 32달러 이후 7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지난주 영국 <데일리 메일>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저유가 충격으로 국제 시장은 휘청거리지만 소비자들은 환호하고 있다”며 현금을 어디에 투자해야 좋을지 점쳐보는 내용이었다. 대형 석유업체 주식은 조급하게 거래하지 말고 관망할 것, 투자 리스크가 있는 중소 수출업체 주식은 부채 현황을 살펴볼 것, 대형 소매업종은 투자 기회이지만 경쟁력을 따져볼 것, 운송업은 최고의 수혜 업종, 녹색 에너지 업종은 수익성이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유가 반등의 반사이익도 기대됨 따위의 원론적 전망이긴 했다. 그보다 눈길을 끈 건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이 러시아를 응징하려 공모했으며, 배럴당 40달러까지 폭락하기 전까진 감산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음모론’까지 나온다는 대목이었다.
이미 미국에서 유가 폭락으로 투자처를 잃은 자본은 주택시장에 눈을 돌리고 있다. 경제전문지 <포천>은 지난 8일 “미국 북동부와 중서부 등 석유산업 지역의 많은 도시에서 유가 폭락세 이후 집값이 전국 평균 7.7%보다 더 빠르게 오르고 있다”며 “다른 지역에서도 저유가가 집값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 경제주간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는 최근 “유가가 배럴당 50달러 아래로 떨어지면 훨씬 좋은가”라는 물음을 던진 뒤, “저유가는 아직까지 패자보다 승자를 더 많이 만들어내고 있다”고 답했다. 석유 수출국보다 석유 수입국의 인구가 훨씬 많고, 미국 소비자들과 기업들도 유류와 석유화학 제품에 대한 지출이 줄었으며, 소비자들은 자동차를 더 많이 구매하고 운행한다는 것이다. 잡지는 특히 “미국 경제에서 소비 지출이 70%를 차지하는 반면, 에너지 산업의 자본 투자는 2%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각국 정부는 유가 하락이 소비 증대와 경기 활성화로 이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조지 오즈번 영국 재무장관은 최근 “소비자들이 연료비, 공공요금, 난방비, 항공료까지 (저유가의) 이득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며 “기업들이 유가 하락의 이득을 소비자들에게 넘겨주는지 ‘매처럼 날카롭게’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일간 <시드니 모닝헤럴드>도 최근 “자동차 운전자들이 이미 기름값 인하의 부수입을 누리고 있으며, 비용절감 효과가 식료품과 다른 일용품에까지 파급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세인트조지 은행의 한 이코노미스트는 “저유가가 소비자들에겐 희소식이며 경제성장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가 폭락은 항공료에도 일부 반영되고 있다. 대한항공 미주 노선의 경우 지난해 10월 유류할증료는 133달러였지만, 올해 1월엔 58달러로 떨어졌다. 그러나 여행자들이 실제 체감하는 항공료 총액의 인하 폭은 미미하다. 항공사들이 저유가의 과실을 대부분 챙겨가기 때문이다. 증권가에선 실적 발표를 앞둔 대한항공의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보다 무려 533%가량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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