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모스크바 거리의 환율정보 전광판 아래를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루블화 가치가 겉잡을 수 없이 폭락하자 16일 러시아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17%까지 올렸다. 모스크바/AP 연합뉴스
러·베네수엘라 저유가에 통화 급락
인도네시아·터키, 재정적자 ‘휘청’
인도네시아·터키, 재정적자 ‘휘청’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달러당 80루블선이 무너지며 사상 최저치로 폭락했다. 지난 3월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서방의 경제 제재를 계기로 본격화된 러시아 경제 위기는 국제유가 폭락이 겹치며, 디폴트(국가부도) 위기설까지 나올 정도로 심각한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특히 러시아 중앙은행이 16일 새벽 기준금리를 10.5%에서 17%로 올리는 ‘극약 처방’까지 동원했는데도 이날 달러화 대비 루블 환율이 80달러선까지 무너지면서, 러시아 경제 위기설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이번 사태가 ‘1998년 신흥국 금융위기’ 재현의 전주곡이라는 우려도 번지고 있다. 98년은 아시아 외환위기 여파로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채무지급 유예)을 선언한 해이다. <블룸버그>는 15일 러시아의 경제 위기와 더불어 디폴트를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평가가 나오는 베네수엘라의 경제 악화가 1998년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고 보도했다.
러시아와 베네수엘라는 국제유가 하락으로 경제에 직격타를 맞은 경우인데, 1998년에도 국제적 수요 부진으로 국제유가가 하락했었다. 98년 유가는 두바이유 기준으로 배럴당 12.2달러 수준으로 전해의 18.17달러 수준보다도 더 하락했다. 이 때문에 1998년 베네수엘라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963년 수준으로 주저앉을 만큼 어려운 한 해를 보냈다.
요즘 여러 신흥국 경제가 잇따라 휘청이고 있다. 인도네시아 루피아는 15일 장중 달러당 1273.5루피아를 기록해 1998년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는 전했다. 터키 리라도 이날 장중 한때 달러당 2.39리라까지 하락해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리라 폭락의 직접적 계기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슬람 성직자 펫훌라흐 귈렌과 대립하면서 벌어진 터키의 정치 불안 때문이다. 하지만 두 나라 통화 가치 약세 현상의 근본적 원인은 달러 선호와 위험자산 회피 흐름이다. 두 나라 모두 재정적자가 크고 기업 부채의 많은 부분이 외국 자본으로부터 꾸어온 외화 자금인 경우가 많아서, 달러가 빠져나갈 경우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양적완화를 축소하기 시작하면서 루피아와 리라 가치는 계속 하락세를 보여왔다.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시발점이었던 타이도 요즘 증시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방콕 포스트>는 타이 증시가 15일 장중 한때 9% 하락해, 하락 폭으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이후 타이 증시는 다시 요동쳐 전날 대비 2.41% 하락으로 마감됐다.
신흥국 투자자들의 이목은 미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시기에 쏠려 있다. 미 연준이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더 강해져 신흥국 통화 가치가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1998년 금융위기와 지금은 다른 점도 많다고 <블룸버그>는 지적했다. 신흥국의 외환보유액이 1990년대 후반에 견줘 증가했고 환율 운용에도 탄력성이 높아졌으며, 금리도 1990년대 후반에 견주면 아직은 낮은 편이라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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