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중 ‘달러당 80루블선’ 무너져
러시아, 금리 인상에도 속수무책
러시아, 금리 인상에도 속수무책
러시아 루블화가 16일 장중 달러당 80루블 선까지 붕괴되며 사상 최저치로 폭락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이 루블 가치를 방어하려고 이날 새벽 기준금리를 6.5%포인트 올리는 강수를 뒀는데도 폭락을 막지 못한 속수무책 상황이다. 러시아 루블 폭락은 신흥국 경제의 위기로까지 번질 조짐이다.
루블은 16일 유럽 시장이 열리자마자 달러당 70루블대가 붕괴된 뒤 사상 최저치(달러 대비 루블 환율 최고치)인 76루블 선을 넘어 80루블 선까지 붕괴되는 대폭락을 기록했다. 전날 대비 20% 폭락이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전날 루블이 달러당 65루블에 육박하자, 16일 새벽 1시(현지시각)께 기준금리를 기존 10.5%에서 17%로 올린다고 선언했다. 올해 들어 6번째 기준금리 인상이며, 이달 11일에 이어 불과 닷새 만의 재인상이다. 금리 인상 뒤 루블은 달러당 58루블까지 다시 가치가 조금 회복됐으나, 오후 들어서 다시 대폭락하기 시작해 달러당 80루블, 유로당 100루블 선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루블은 연초 33루블에 비해 무려 60% 가까이 가치가 하락했다.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1998년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러시아 루블의 폭락은 전세계적인 디플레이션(상품, 자산 등의 가치 하락) 조짐 속에서 침체를 보이는 신흥국 경제의 위기로 증폭될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이날 터키, 타이, 인도네시아 통화들의 가치도 폭락하며,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터키 리라화는 개장하자마자 전날에 비해 달러당 0.4% 떨어지며 이틀째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 등 지정학적 위기로 촉발된 러시아 경제위기는 올해 6월부터 시작된 유가 폭락이 겹치며 루블화 폭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전세계적인 디플레이션 조짐 속에서 달러화 강세로 위축되는 신흥국의 경제위기로 전염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우려되던 더블딥(짧은 회복 뒤의 재침체)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마저도 일고 있다.
루블화의 폭락은 러시아 경제의 주요 수입원인 유가 폭락으로 현재로서는 그 끝을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20%에 가까운 금리 인상 조처에도 루블화가 이날 오히려 더 폭락한 데서 잘 드러난다. 15일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배럴당 55.91달러로 금융위기 여파가 한창이던 2009년 이후 최저가를 기록했다. 브렌트유 선물 가격도 16일 장중 배럴당 60달러 선이 붕괴됐다.
러시아가 재정 균형을 맞추려면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수준이 되어야 하는데, 러시아 중앙은행은 국제유가가 배럴당 60달러 수준에 계속 머무른다면 내년 러시아 성장률이 -4.5~-4.7%로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미국과 유럽의 경제제재가 러시아 경제에 타격을 준데다 물가상승률도 10%에 달해 국민들의 고통도 커지고 있다.
모스크바 일부 상점에서는 소련 붕괴 뒤 혼란했던 1990년대에 볼 수 있던 풍경들이 다시 나타날 조짐도 보이고 있다. 1990년대 모스크바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루블 가치 때문에 일부 상점들이 가격을 명시하지 않고 “시가”라고만 써놓고는 했는데, 요즘 다시 이런 상점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모스크바 타임스>는 전했다.
국내 금융시장의 움직임도 불안한 모습이다. 이날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16.23 내린 1904.13으로 거래를 마쳤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날보다 12.4원 내린 1086.70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조기원 방준호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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