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유럽 재정위기를 촉발했던 그리스의 정국 불안이 유럽 경제를 다시 뒤흔들고 있다.
안토니스 사마라스 그리스 총리가 정권의 신임을 묻기 위해 대통령 선거를 예정보다 두 달 앞당겨 이달 중에 치르겠다고 8일 오후 선언하자, 신민주당(ND) 주도 집권 연정이 몰락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됐다. 총리의 깜짝 발표 하루 뒤인 9일 그리스 증시는 1987년 이후 하루 최대 낙폭을 기록하며 12.8% 하락했다. 이 여파로 이날 영국 증시의 FTSE100, 프랑스의 CAC40, 독일의 DAX 지수가 각각 2.14%, 2.55%, 2.21% 하락했다.
그리스에서 대통령은 상징적 국가원수에 불과하며 의회에서 뽑는데, 선출에 실패하면 정부는 의회를 해산하고 내년 2월 조기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 조기 총선이 실시되면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이 이길 확률이 높기 때문에, 사마라스 총리의 조기 대선안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도박이다. 시리자는 그리스 긴축재정에 반대하고 대외 채무 재조정을 주장하고 있어, 유럽 금융가에서는 시리자의 집권 가능성을 우려한다. 7일 그리스 일간 <엘레프테로스 티포스>를 보면, 시리자의 최근 지지율은 28.6%로 여당인 신민주당(25.5%)보다 앞서 있다.
사마라스 총리는 스타브로스 디마스 전 외무장관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대선 날짜는 17, 22, 29일로 발표했다. 그리스 대선은 3번까지 투표할 수 있지만, 통과되려면 찬성표가 전체 의원 300표 중 1차와 2차에서는 각각 200표 이상 그리고 마지막 3차에서는 180표 이상 나와야 한다. 신민주당 연정 소속 의원수는 155명에 불과해 대선은 3차까지 갈 게 거의 확실한데, 3차에서도 180표 이상을 얻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사마라스 총리가 조기 대선이라는 배수진을 친 이유는 구제금융 조기졸업 추진 과정에 따른 정치·경제적 혼란 때문이다. 그리스는 올해 4월 4년 만에 처음으로 5년 만기 국채를 4.95%의 비교적 낮은 금리로 발행하면서 국제 자본시장에 복귀했다. 그리스 정부는 국제 자본시장 복귀를 통해 2010년부터 유럽중앙은행과 유럽위원회, 국제통화기금(IMF) 트로이카에서 받아온 2400억유로 구제금융을 조기 졸업한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웠다.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은 2016년에, 유럽연합 구제금융은 올해 졸업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9일 그리스의 3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8% 가량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치솟는 등 구제금융 조기 졸업 성공 가능성에 대한 회의와 긴축재정 감내에 대한 국민들의 피로감이 최근 점점 높아졌다. 사마라스 총리가 조기 대선을 선언한 8일은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유럽국가들) 재무장관들이 그리스가 세금 인상과 연금 축소 등 긴축재정을 감내하는 조건으로 그리스 구제금융을 2개월 연장해주기로 한 날이었다. 사마라스 총리는 이날 연설에서 “우리 경제는 회복되고 다시 성장세로 돌아섰지만 그리스의 정치적 안정성에 대해서는 먹구름이 커져왔다”며 조기 대선이 정권의 신임을 묻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사마라스 총리의 도박이 실패해서 시리자가 집권하면 그리스 구제금융의 전체 틀이 흔들릴 수 있다. 투자은행 르네상스캐피탈의 선임 이코노미스트인 찰스 로버트슨은 <파이낸셜 타임스>에 “우크라이나 사태 이상으로 앞으로 6주 정도는 그리스 상황이 세계 시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며 “시리자가 집권하면 유로존은 (그리스 부채 삭감을 통한) 재정 연합과 첫번째 유로존 회원국 축출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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