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재고 유일한 해법 ‘가격 인하’
생산자 물가 32개월 하락세 이어져
설비투자 과다·성장세 둔화가 원인
‘환율전쟁’ 땐 일·EU에 최후의 일격
“디스인플레일뿐” 과잉해석 경계도
생산자 물가 32개월 하락세 이어져
설비투자 과다·성장세 둔화가 원인
‘환율전쟁’ 땐 일·EU에 최후의 일격
“디스인플레일뿐” 과잉해석 경계도
전세계 시장으로 나가는 온갖 물건들이 거래돼 ‘확대판 월마트’라는 별명을 얻은 중국 저장성 이우시 외곽의 많은 공장들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세계 각국의 주문 물량을 소화하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올해 일부 제품은 원가 이하로 판매되고 있다. 플라스틱 크리스마스트리를 수출하는 한 중소기업의 공장장은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에 “고객들은 모두 경기가 좋지 않다며 더 낮은 가격을 요구한다. 이문이 없어도 어쩔 수 없이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중국 경제의 하강 속도가 빨라지면서 ‘중국발 디플레이션’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디플레이션은 물가 하락과 경기침체가 나타나는 현상을 말하는데 <파이낸셜 타임스>는 최근 세계 최대 도매시장 이우의 풍경을 전하면서, 과잉설비와 물가 하락으로 중국이 디플레이션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중국의 많은 공장들은 재고를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고, 유일한 해법은 가격 인하다. ‘세계의 공장’ 중국의 가격 하락 추세는 가뜩이나 수요 부진과 낮은 인플레이션으로 고민하는 세계 경제를 더욱 끌어내릴 기세다.
문제는 중국의 과잉투자다. 중국 기업들이 고속성장기와 2009년 경기부양 이후 대대적으로 투자한 설비들이 수요 부진으로 남아돌게 됐다.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격을 내려야 하고 이는 디플레이션 압력을 더욱 키운다. 그 결과 중국의 생산자 물가도 10월(-2.2%)까지 32개월 연속 하락세다.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정부 목표(3.5%)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6% 상승에 그쳐 거의 5년 내 최저치로 떨어졌다. 지난 1일 중국 국가통계국이 발표한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는 50.3으로 8개월 만에 가장 낮았다. 중국 당국의 각종 부양책에도 제조업이 침체 기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시에테제네랄의 앨버트 에드워즈 투자전략가는 “(디플레이션과 관련해) 유로존보다 중국에서 훨씬 더 큰 문제가 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중국 국책 투자은행인 중국국제금융공사도 최근 보고서에서 유가 등 주요 원자재 가격 하락 등이 물가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2015년 중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4%까지 내려갈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의 성장세 둔화는 최근 철광석, 원유를 비롯한 국제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다. 게다가 과잉투자된 중국 철강기업들이 국내 소비처를 찾지 못하자 저가에 밀어내기 수출을 하면서 전세계 철강 가격을 끌어내리고 있다. 올해 1~10월 중국산 철강 수출량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면서, 중국발 철강 디플레이션이 전세계로 확산될 조짐을 보인다는 얘기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중국 인민은행이 최근 2년여 만에 단행한 기준금리 인하 조처는 디플레이션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선제 대응이라고 지적했다. 만성적 과잉설비와 성장세 둔화라는 근본적 원인은 해결이 어렵다. 중국 정부는 철강과 화학, 태양광 전지, 조선 등 여러 산업에 장기간 과도한 투자를 해왔다. 부동산 거품도 문제다. 지난달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는 ‘유령도시’, 빈 경기장, 불필요한 제철소 등 비효율적인 투자에 낭비된 돈이 2009년부터 6조8000억달러에 이른다고 밝혔다. 특히 중국 정부가 구조개혁 과정에서 긴축에 나서자 과잉투자했던 기업들이 ‘그림자 금융’에 기대면서 금융시스템이 더 위험해졌다.
중국 당국은 추가 금리 인하와 선별적 경기부양이란 카드를 쓸 수도 있지만, 이는 경제 구조개혁에서 후퇴한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중국 정부는 최근 2개월간 모두 1조위안(약 180조원)에 육박하는 35개의 대형 프로젝트 투자계획을 승인했다. 중국 당국이 이르면 이달 안에 지급준비율을 최소 0.5%포인트 인하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런 부양책마저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중국 당국이 결국 위안화 절하에 나설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금리 인하는 대형 국유기업 등이 주요 수혜자지만 위안화 평가절하는 수출 경쟁력과 물가를 동시에 띄울 수 있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안화 평가절하는 유럽과 일본의 디플레이션 대응 노력에 ‘최후의 일격’을 가할 수 있다. 위안화 가치가 하락하면 세계로 수출되는 중국산 제품의 가격이 더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이 아베노믹스를 통해 공격적 양적완화를 계속한다면, 중국도 환율전쟁에 뛰어들 강한 유혹을 받게 된다.
한편에선 중국은 디플레이션 상황이 아니라, 물가상승률이 둔화되는 디스인플레이션 상황이라는 해석도 있다. 흥업은행 수석경제학자 루정웨이는 <인민망>에 “현재 중국의 소비자물가는 여전히 상승하고 있으며 단지 상승폭이 둔화되고 있을 뿐이어서 아직 디플레이션이라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중국 국가통계국 성라이윈 대변인도 “여러 각도에서 볼 때 중국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져들고 있다는 판단은 증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소비자물가 상승 외에도 화폐 유통량의 완만한 증가, 주가 상승, 여전히 유지되는 신용대출 총량 등이 근거다. 하지만 푸단대학 경제학원 쑨리젠 부원장은 “중국에 아직 디플레이션이 출현하지는 않았지만 부동산 시장 위기와 지방정부 부채, 원자재 가격 폭락 등이 가져올 잠재적 디플레이션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영률 기자 ylpak@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