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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경제

‘D의 공포’, 세계를 덮치다

등록 2014-11-16 20:22수정 2014-11-16 20:24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최대 50% 세일’이라고 쓰인 상점 앞을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세계 각국이 물가 하락으로 인한 디플레이션 위기를 막기 위해 고심중이다.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로화를 쓰는 18개 국가의 지난 9월 연율 인플레는 0.3%까지 급락했다.  토리노/EPA 연합뉴스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최대 50% 세일’이라고 쓰인 상점 앞을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세계 각국이 물가 하락으로 인한 디플레이션 위기를 막기 위해 고심중이다.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로화를 쓰는 18개 국가의 지난 9월 연율 인플레는 0.3%까지 급락했다. 토리노/EPA 연합뉴스
유럽·중국 등 저인플레 고민
각국 천문학적 돈 풀었지만
금융만 번성, 실물경제 시들어
저성장·고실업 등 ‘뉴노멀’ 현실화
‘이제 인플레이션은 잊어라. 디플레이션이 찾아오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가 디플레이션 시대로 빠져들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금융위기 직후부터 우려됐던 디플레이션은 올해 하반기 들어 현실이 되고 있다. 현재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 등 선진국 주요 중앙은행들의 최대 목표 중 하나는 연 2%의 인플레이션 목표치 달성이다. 미 연준 등 세계 3대 중앙은행이 금융위기 이후 무려 7조달러를 풀었는데도, 경기활성화는 고사하고 2%의 인플레를 달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상황이다.

미국은 1.7%의 인플레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운 상황이다. 유럽에서는 유로화를 쓰는 18개 국가의 지난 9월 연율 인플레가 0.3%까지 급락했다. 영국은 9개월째 1.2%를 보이고 있다. 선진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고도성장으로 얼마 전까지 경기 과열과 소비자물가 급등을 걱정하던 중국과 인도 역시 전례없는 저인플레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중국의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6%였다. 인도는 2.38%로 떨어졌다. 인도는 1년 전만 해도 인플레가 10%대였다.

특히 세계 경제의 엔진이라는 중국의 상황은 심각하다. 10월 생산자물가는 1년 전에 비해 -2.2%, 9월에 비해서는 -1.8%, 8월에 비해서는 -1.2% 떨어졌다. 중국의 생산자물가는 32개월째 오르지 못하고, 디플레 덫에 갇힌 것으로 분석된다.

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져 실제로 디플레 상황에 들어간 나라도 있다. 스웨덴은 9월 물가 상승률이 -0.4%, 10월엔 -0.1%를 기록했다. 이스라엘 역시 10월에 -0.3%를 보였다.

더 큰 문제는 향후 인플레 기대치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의 인플레 기대치는 올해 여름부터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바클레이스은행이 집계한 향후 5년간 예상 인플레는 유로존의 경우 지난 7월 2.1%에서 10월 들어 1.82%로 떨어졌다. 국제통화기금은 1년에 두 분기 이상 물가가 하락할 경우 디플레이션으로 정의하는데, 내년 유로존이 디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을 30%로 보고 있다.

미국 재무부의 10년 만기 일반 채권과 인플레로 인한 가치하락을 보전하는 물가연계 10년 채권의 가격 차이를 근거로 예상한 향후 10년간 인플레 예상치도 하락하고 있다. 10년간 인플레 예상치는 지난해 말 2.2%였으나, 현재는 1.9%로 떨어졌다. 1년간의 예상치는 1.5%에서 -0.75%까지 떨어졌다.

이 때문에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지난달 31일 연간 10조~20조엔 규모의 추가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지난해 4월 실시된 양적완화 이후 1년6개월 만에 단행된 추가조처다. 유럽중앙은행도 지난 6일 사실상 제로금리인 현재의 0.05% 기준금리를 유지하는 한편 “필요하다면 비전통적 조처들을 추가로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중앙은행은 지난 9월 회사채 매입을 확대하는 한편 그 이상의 조처도 취할 수 있다고 시사했다. 즉 국채 매입으로 확대할 수 있다는 의미였고, 현재 상황이라면 유럽중앙은행도 내년 초에 미국처럼 완전한 양적완화를 실행하는 수순으로 들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중앙은행은 회원국들의 재정건전성 기준에 집착하느라고, 금융위기 이후에도 돈풀기에 극도의 신중함을 보여왔다. 금융위기가 발발한 2008년에 오히려 금리를 올린 데 이어, 2011년에도 금리를 추가인상하는 조처를 취했다. 유럽연합이 현재 가장 심각한 디플레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은 이런 정책적 실기와 무관하지 않다.

채권왕 빌 그로스는 지난 3일 자신이 운영하는 ‘야누스 캐피털 그룹’ 투자전망서에서 세계 중앙은행들이 금융위기 이후 천문학적인 규모의 돈을 공급했으나 상품과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기보다는 증권 등의 가격만 올렸다며 “가격은 올랐으나, 올바른 가격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경제의 한 분야(금융분야)는 번성했으나, 다른 분야(실물경제)는 시들었다”며 “우리는 그런 불확실성의 시대에 있다”고 경고했다. 채권회사 핌코의 최고경영자 모하메드 엘에리언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가 항구적으로 저성장, 저소비, 고실업 상황에 빠질 것이라며, 이를 ‘뉴노멀’(new normal, 새로운 정상)이란 용어로 소개한 바 있다. 이제 그 뉴노멀이 디플레이션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디플레 시대가 온 것은 금융위기 이후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천문학적인 돈풀기에도 불구하고 소득 양극화로 인해 일반 대중의 구매력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그로스가 지적한 ‘상품이나 임금이 아니라 증권 가격만 올랐다’는 현상이 원인이다. 이 때문에 그로스는 “실물경제가 통화 발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나, 돈을 쓰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며 “이는 재정 쪽, 즉 정부 쪽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현재 정부들이 “재정적자를 절대 반대하면서 균형재정이라는 공포에 짓눌려 있다”고 비판했다.

선진국 경제 중에서 그나마 상태가 나은 미국은 올 하반기에 양적완화를 종료했다. 11월 중간선거에서 균형재정을 주장하는 공화당이 승리함으로써 미국은 갈수록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정책을 구사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전후 세계 경제의 최대 숙제였던 인플레이션이 이제는 달성해야 할 최대 목표가 된 디플레이션 시대가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왔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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