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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경제

추락하는 루블, 날개가 없다

등록 2014-11-09 20:15

루블 가치 연초 대비 40% 폭락
러 중앙은행 “금융 불안” 경고
국제유가 급락에 미 양적완화 종료
미·유럽 우크라 사태 관련 제재 원인
유가 상승 기반한 푸틴 체제도 위협
러시아 루블이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러시아 경제가 경기침체와 스태그플레이션의 중간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지만, 위기를 해결할 만한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는다. 흔들리는 러시아 경제는 동유럽 경제에도 직격탄을 가하면서, 세계 경제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루블은 최근 1998년 루블 액면 가치를 1000의 1로 만드는 화폐개혁 이래 사상 최저 기록을 계속 경신하고 있다. 지난달 8일 심리적 지지선이던 달러당 40루블 선이 무너진 뒤 추락 속도는 가팔라지고 있다. 러시아중앙은행은 지난 한달 동안 290억달러를 풀고 지난달 31일에는 기준금리를 8%에서 9.5%로 크게 올렸지만, 루블 가치 하락을 막지 못하고 있다. 7일에도 루블 가치는 달러당 46.73루블을 기록해 연초 대비 40% 넘게 폭락했다. 러시아중앙은행은 5일 환율 방어를 위해 하루 3억5000만달러 이상은 쓰지 않겠다고 밝혀 사실상 자율변동환율제 이행을 밝혔지만, 7일에는 최근 루블 가치 하락이 가팔라 “금융 불안을 일으키고 있다”며 루블 가치가 위험 수준에 들어서면 “언제든 개입할 수도 있다”고도 했다.

러시아 신용등급도 추락하고 있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지난달 러시아 국채 신용등급을 Baa1에서 Baa2로 내리며 전망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에스앤피(S&P)는 지난달 러시아 국채 신용등급을 BBB-로 유지하기로 했는데, 이는 정크본드(투자 부적격 채권) 바로 위 단계다. 거시경제 전망도 음울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러시아의 올해 경제성장률이 0.2%에 그칠 것이라 예상했다. 도이체방크는 내년 러시아 성장률을 -0.2%로 전망했다. 반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올해 7.4% 그리고 내년에도 7.3% 고공행진을 이어갈 것으로 국제통화기금은 예상했다.

루블 폭락의 배경은 국제 유가 하락과 미국 양적완화 종료,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미국과 유럽의 러시아 경제제재가 꼽힌다. 이 가운데 핵심은 사우디 등 주요 산유국의 증산과 미국의 ‘셰일 혁명’으로 인한 국제 유가 하락이다. 4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12월 인도분 서부텍사스 원유(WTI)는 배럴당 77.19달러로, 2011년 10월4일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이 러시아 재정수입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유가의 속절없는 하락은 치명타다. 러시아의 재정 균형은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이상에서 거래된다는 가정에서 달성되도록 짜여 있다. 소련 붕괴의 원인 중 하나로 국제 유가 하락이 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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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상황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1999년 이후 국제 유가의 대세 상승이 이어져 푸틴 대통령의 집권 기반이 굳건해진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물가 상승을 보정한 연평균 국제 유가는 98년 17.1달러에서 99년 23.2달러, 2000년 37.19달러 그리고 2006년 67.63달러로 올랐다. 러시아는 유가 상승에 힘입어 200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을 중심으로 발족한 채권국가 모임인 파리클럽에 450억달러를 갚아 소련 시절 부채를 모두 해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흐름이 반대 방향으로 돌아섰다.

미국이 이달부터 양적완화를 종료해 안전자산인 달러 가치가 올라가면서 러시아 같은 신흥국에서 외국인 투자자금이 빠져나가는 현상도 루블 가치 하락을 부채질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과 유럽이 7월부터 본격화한 경제제재는 설상가상으로 러시아에 직접 타격을 줬다. 루블 가치 하락이 러시아 수출기업 대외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문제는 러시아가 오랜 수출다변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수출에서 차지하는 에너지의 비중이 너무 커서 루블 약세가 수출경쟁력 강화 효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루블 가치 급락은 러시아인들에게 옛 악몽을 상기시킨다. 러시아는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 여파로 인한 자금 이탈로 모라토리엄(채무 지급 유예)을 선언한 아픔이 있다. 모라토리엄 전 러시아는 고정환율제로 달러 대 루블 가치를 1 대 6 정도로 고정했으나, 실제로는 1 대 10 정도였다. 견디다 못한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며 루블 평가절하 조처를 취하자, 러시아에서는 루블을 환전소에서 달러로 바꾸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은 지난달 24일 기준 4391억달러로 아직은 디폴트(채무 불이행)나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상황은 아니라는 판단이 우세하지만, 시장이 패닉에 휩싸이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수도 있다.

루블 가치 하락은 미국의 양적완화 종료로 가뜩이나 불안한 동유럽 신흥국들에도 타격을 주고 있다. 폴란드 통화 즈워티 가치는 지난달 16개월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고, 헝가리 통화 포린트 가치도 같은 기간 5% 하락했다. 국제통화기금은 올해 세계 경제를 전망하면서 신흥국 중에서도 특히 동유럽 경제권의 부진을 우려했다.

러시아와 서유럽은 에너지 부문 외에 직접 교역 규모가 적지만 동유럽은 그렇지 않다. 동유럽 경제의 부진은 디플레이션 우려에 시달리는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유럽국가들)에도 타격을 준다. 러시아 경제의 부진이 더욱 심각해진다면, 미국 양적완화 중단으로 인한 신흥국 자금 이탈을 가속화해 동유럽뿐 아니라 신흥국과 세계 경제 전체에 도미노로 부담을 지울 수 있다. 국제정치학연구소인 우드로윌슨센터의 윌리엄 포머랜츠 부소장은 <로이터> 통신에 기고한 글에서 “이성적 대화가 필요한 시기이지만 푸틴 대통령은 이런 대화를 회피하고 있다. 푸틴이 위기를 만들었으니 해답도 내놓아야 한다”고 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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