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투 강변에는 비나 남매뿐만 아니라, 많은 어린이 노동자들이 함께 돌을 깬다. 바투 강변에서 아이들이 돌 깨는 노동 중에 함께 놀이를 하고 있다. ‘희망의 언덕’ 제공.
‘노동의 덫’에 갇힌 네팔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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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탁, 탁….”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차로 10여 시간 거리인 서부 고라히 지역. 자그마한 손 하나가 제 주먹보다 훨씬 큰 자갈을 들어 고무로 만든 둥근 원 속에 밀어넣고 망치로 열심히 두드린다. 여린 망치질이지만 여러 차례 계속되자 자갈은 어느새 작은 조각들이 된다. 자그마한 손으로 돌조각을 고무로 만든 원 속에서 꺼내 한쪽으로 밀어넣는다.
장난기 잃은 7살 노동자의 얼굴
“언니, 조그마한 걸로 던져.” 주변에서 깨뜨릴 만한 돌을 찾던 서르밀라(7)의 목소리가 고라히 작은 강 바투의 아침 정적을 깨뜨린다. 오전 8시다. 돌을 깨는 서르밀라의 얼굴에 7살짜리 어린아이의 얼굴에 떠오를 법한 장난기는 없다. 헐거워진 망치를 조이는 일도 아이의 손길이라기보다 능숙한 일꾼이 하는 것에 가깝다. 옆에는 언니 비나(14)가 작은 쇠스랑으로 강바닥을 긁어 돌과 자갈을 골라내고 모래를 모은다. 제법 큰 돌은 깨서 다시 자갈로 만들기 위해 한쪽으로 던져놓는다. 맨손이다.
‘세계의 지붕’이라 부르는 산악지대 네팔의 하천 주변에서는 서르밀라와 비나처럼 돌 깨는 어린이 노동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네팔의 어린이 노동자 권익 활동단체들은, 네팔에는 2012년 현재 210만 명 이상의 어린이 노동자가 있다고 주장한다. 어린이 노동자는 광산노동부터 성(性)산업에 이르기까지 80개 업종에서, 어른들이 종사하는 대부분의 직종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은 장시간 노동, 열악한 영양 상태, 구타, 성폭력, 교육받을 권리 박탈, 저임금이나 무임금 상태에 노출되어 있다. 비나가 일하는 건설부문(돌깨기와 벽돌공장)에서 집계된 어린이 수만 약 10만 명에 이른다. 네팔 정부는 1992년 14살 이하 어린이의 노동을 금지했지만, 국내 정치 분쟁에 바빠 어린이 노동 문제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비나 같은 돌깨기 어린이 노동자들의 특징은 노동이 가족 단위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돌 깨는 노동은 보통 토지가 없는 농촌 사람들이 굶주림을 피해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 작업은 빈곤에 처한 가족들이 최소한의 생계유지를 위해 가장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일이다. 강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네팔의 강이 있는 지역 주변에서 쉽게 목격된다.
굶주린 가족들은 강 주변에 무허가로 천막이나 대나무 등으로 엮은 곳에서 살기 때문에 주거환경이나 보건위생이 열악하다. 또한 식수가 부족해 오염된 물을 그대로 마셔 설사와 피부병, 간염 등 각종 질병에 노출되어 있다. 오랜 기간 돌깨기를 해서 흙먼지로 인한 폐병이나 눈병에 잘 걸린다.
비나는 8살 때부터 노동을 시작해, 올해로 돌깨기 노동경력 6년차에 접어든 어린이 노동자다. 5살 때부터 돌깨기를 한 동생 서르밀라보다 3년 늦게 시작했지만, 돌깨기 노동에서는 전문가로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다. 비나, 서르밀라와 함께 큰언니 툴시(18), 남동생 프락카시(10)가 함께 돌을 깨면서 살아간다.
아버지는 이주노동 때 심한 화상 입어
비나의 아버지 나젠드라 비커(45)와 엄마 수지트라 비커(38), 그리고 6개월 된 남동생 루빈은 비나가 사는 고라히에서 이틀 정도 가야 하는 퍼침 지역의 산속에서 산다. 아버지는 말레이시아에 이주노동을 다녀온 뒤로 강가에는 잘 내려오지 않으려 한다. 아버지는 8년 전 가족을 이끌고 현재 비나 남매가 생활하는 바투 강가로 이주했다. 여느 가난한 가족들처럼 산속의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2007년 꿈을 안고 말레이시아로 이주노동을 떠났는데, 6개월이 채 안 되어 몸에 심한 화상을 입고 다섯 달 동안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귀국 뒤, 말레이시아 갈 때 진 빚을 겨우 갚고 나서 엄마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서 아이들을 모두 부양할 수 없어 비나 남매만 강가에 남아 돌을 깨며 사는 것이다.
요즘 비나 남매는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한다. 우기인 5~9월이 되기 전에 더 많은 돌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건기인 지금은 말라버린 강바닥의 모래도 채취할 수 있지만, 우기가 되면 불어난 강물 탓에 대부분 강가에서 돌만 깨야 한다. 이날도 비나는 이른 아침부터 돌 깨는 작업을 했지만, 점심을 간단히 해결한 뒤 다시 오후 2시부터 강바닥의 모래를 파 모으기 시작했다. ‘지루하지 않으냐’고 묻자, 비나는 수줍게 웃으며 “재밌어요”라고 답했다. 다시 정색을 하고 ‘정말 재미있느냐?’고 묻자 그제야 비나는 “솔직히 말하면 어렸을 때는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힘들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비나가 힘들다고 느낀 것은 돌깨기 노동을 시작한 지 4년째 되던 11살 때부터였다. 이 어린 노동자는 “이 일 외에는 아는 것이 없어요. 이 일은 우리에게 밥을 줘요.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돼요”라고 말했다.
운명의 11살, 노동의 괴로움 심각하게 느껴
어린이 노동자의 상당수가 11살이 되면 노동의 괴로움을 심각하게 느낀다. 이때부터 아이들이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어린이 노동에 관한 한 보고서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11살이 되면 노동을 시키려는 욕구가 증대된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작지만 힘이 붙어 노동력의 가치를 이전보다 높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부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비나의 옆집에 사는 저크라 바하두르(40)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보다는 노동을 시키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한국 같은 부자 나라에서는 아이들이 당연히 공부만 하겠지만, 이곳 아이들은 어쩔 수 없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일해야 해요. 공부도 해야 하고 일도 해야 하지만, 일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이들이 돕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식량이 떨어지면 아이들을 학교에 가지 못하게 합니다.”
네팔의 설카리공립학교는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라 무료지만, 간신히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로서 적잖은 비용이 든다. 시험 치를 때마다 돈을 내야 하고, 책과 공책, 교복을 구입하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간다. 비나도 한국 비정부기구(NGO) ‘희망의 언덕’이 지원하는 ‘어린이 노동자 학교 보내기’ 프로젝트를 만나기 전에는 학교에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희망의 언덕 덕분에 학교를 다니게 됐지만, 학교조차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선생님이 결근을 많이 한다. 저임금에 시달리는 네팔의 교사들은 축제 기간이나 휴일 외에도 한 달 평균 4일쯤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 아프다는 핑계를 댄다. 출석한 뒤에도 출석만 부르고 자기 일을 보러 가는 것이 다반사다. 선생님이 없으면 아이들은 학교에서 숙제를 하거나 집으로 돌아와버린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그러나 비나는 마음이 편치 않다. “저는 선생님이 오지 않으면 기분이 좋지 않아요. 다른 아이들은 신나하지만 저는 공부를 하고 싶거든요.”
새벽 4시부터 일한 대가 1200원
비나는 학교 다녀오는 시간 이외에는 대부분 일터인 강가에서 일한다. 누가 아프거나 집에 급전이 필요할 때는 학교를 빼먹을 때도 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나는 새벽 4시부터 열심히 망치를 휘두르면 하루에 50kg 마대로 4자루 정도 자갈을 깰 수 있다. 1자루의 자갈은 20루피(약 300원)에 팔린다. 그러므로 비나의 일당은 1200원 정도인 것이다.
과연 비나만큼 돌을 깨려면 어느 정도의 숙련도와 노동력이 필요할까? 나는 어린이 노동의 강도를 알아보기 위해 희망의 언덕 네팔 지역 활동가 키마 싱(23)과 함께 작업에 참여해보았다. 성인인 나는 6시간30분 만에 겨우 1자루 분량의 돌을 깰 수 있었다. 생수 1병 값이다. 온몸에 돌먼지를 뒤집어쓰고 옆에서 일하는 아이 이마에 생채기까지 낸 뒤였다. 싱은 돌깨기 작업에 참여한 지 7일째 되던 날 과로로 쓰러져 13시간 거리의 카트만두까지 응급차로 후송되었다. 나와 싱은 육체노동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영양가 없는 음식으로 연명하는 비나 남매의 노동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건기에는 돌깨기뿐만 아니라 모래 채취도 주요 수입원이다. 비나는 혼자서 닷새 동안 모은 모래더미 하나를 250루피(약 3750원)에 팔았다. 어른 두 사람이 트랙터 위로 모래를 퍼올리고 있었다. 그 옆에서 비나는 자갈을 다시 골라서 밖으로 쳐냈다. 주위에는 어른 몇 명과 돈을 세는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모래 판 돈을 받아쥔 비나가 오랜만에 웃음을 머금는다.
바투강 주변에는 20여 개의 불법회사가 아이들이 채취해놓은 모래와 자갈을 사들이고 있다. 회사별로 2~3개씩 보유한 트랙터를 모두 합하면 70여 대에 이른다. 이들은 아이들에게서 사들인 모래나 깨진 자갈을 대부분 주변 도로 보수나 가옥 건축 현장에 판매한다.
정부 정책 변화에 일거리 잃을 처지돼
트럭 운전사들은 모래 등을 사주는 주요 구매자이지만, 일부는 여자아이가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여자아이들은 트럭 운전사 등을 비롯한 성인 남자들과의 접촉으로 너무 일찍 성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일부 트럭 운전사를 비롯한 남성들이 적은 돈을 주고 아이의 성을 사기도 한다. 트럭 운전사들은 아이에게 물건을 사주거나, 때로는 학교에 차를 태워주면서 자연스럽게 접근한다. 이런 사례가 많은 탓에 아이들 사이에서 ‘바람이 났다’는 은어로 ‘정글에 간다’는 말이 생길 정도다.
이런 모습은 강이 흐르는 지역이면 네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다. 고라히 지역 외에 희망의 언덕이 어린이 학교 보내기 캠페인을 진행하는 동부 섭더리 지역, 카트만두에서 차로 1시간30분 정도 걸리는 다딩 지역 등에서 강가 돌을 깨는 아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지난해 말 다딩 지역을 방문했을 때 초등학생인 카마라와 라주는 집 앞에서 돌을 깨고 있었다. 그들의 엄마들은 집에서 1시간30분 정도 가야 하는 상류 지역에 돌을 깨러 갔다. 집 근처에는 물이 흘러 돌깨기에서 큰 성과를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두 엄마는 새벽 3시에 집을 떠나서 저녁 6시까지 일을 한다. 카마라와 라주는 학교에 가야 하기 때문에 집 앞에서 돌을 깨는 것이다. 카마라의 아버지 선재 구릉(45)은 요즘 카마라 때문에 걱정이 많다. 카마라의 중간고사 성적이 나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카마라가 아침에도 일하는 바람에 학교에 지각하는 날이 많아서라며 안타까워했다. 또 요즘 카마라가 힘이 없어 보이는데, 돌 깨는 환경으로 먼지가 많아서 그런 듯하다고 했다.
카마라가 다니는 다딩학교의 교장이었던 사누카지 알리는 이 지역에서 돌 깨는 어린이 노동자 모두 500여 명에 이른다고 했다.
아이들은 강변의 돌에 인생이 짓눌려 있지만, 단기적으로 볼 때 그 차가운 돌 덩어리들은 아이들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해주는 일거리다. 아이들이나 그 가족에게 다른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정책이나 기술에 변화가 일어나면 그들은 바로 생계의 터전을 잃게 될 것이다.
최근 바투강을 의지해 살던 비나와 이웃들에게는 정부의 정책 변화가 근심거리로 다가오고 있다. 네팔 정부가 2년 안에바투 강가에서 모두 떠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근처에서 목회를 하는 사하 킴(30)은 “바투강 주변에서 사는 사람은 대략 2500명입니다. 그중 500명 이상이 일하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과 그 가족들은 바투를 의지해 살아갑니다. 아이들이 일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이 일마저 없으면 아이들은 더욱 비참해질 겁니다”라고 말했다.
다딩에 사는 구릉도 최근 집 앞까지 돌 깨는 기계 2대가 코앞까지 들어오자 한숨이 늘었다. 자갈과 모래 구입 업체에서 돌 깨는 기계를 들여와서이다. 깨놓은 자갈을 팔지 못해 오랫동안 집 앞에 쟁여놓은 사람도 생겼다. 기계는 사람보다 일정한 크기로 돌을 깨는 탓에 기계로 깬 돌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기계가 더 많이 돌을 깨게 되면, 설사 계속 깬 돌을 팔 수 있다 하더라도 돌 1자루 가격이 현재의 20루피보다 더 싸질 것이라고 걱정한다.
이에 따라 구릉은 앞으로 기계가 더욱 늘어 돌 깨는 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면 시골로 가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시골은 돌 깨는 것으로 연명하는 다딩 강변가 생활보다 더 형편없지만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가족 모두가 무사히 다른 지역으로 옮기거나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만일 아이들이 부모를 잃거나 가난 때문에 가족과 헤어진다면 아이들은 더 험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새엄마가 6만원에 아이 팔기도
현재 희망의 언덕 쉼터에서 보호받고 있는 조티와 여겨는 인신매매의 희생양이다. 두 남매는 네팔 동부 섭더리 강가에서 오랫동안 돌깨기 노동자로 생활했다. 하지만 오랜 심장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아이들을 돌봐오던 엄마가 지난해 초 사망하면서 아이들의 운명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엄마가 숨지기 전부터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 아들 둘을 두고 자파에 살던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거의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지난해 통틀어 2회 방문했고, 고작 쌀 2kg을 사주고 가버렸다. 두 아이는 학교에도 가지 않고 돌을 깼다. 그럼에도 식량을 충당하기 힘들어서 동네 친구 집을 돌아다니며 구걸했다. 동생 여겨는 “조티는 엄마가 죽은 집에서 잠을 자는 것이 무섭다며 밤마다 울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1일 새엄마가 찾아왔는데, 식량을 전해주러 온 것이 아니었다. 새엄마는 조티를 데리고 8시간 거리에 있는 일람으로 떠났다. 그녀는 일람의 어느 가게에 조티를 주고 4천루피(약 6만원)를 받았다. 그러나 다행히 이 사실이 희망의 언덕 활동가에게 알려져 조티는 구출되었고, 현재 동생과 함께 카트만두의 쉼터에 머물고 있다.
글 / 김요한 바보들꽃공동체 ‘희망의 언덕’ 활동가 hyimangjo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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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서부 고라히 지역의 바투강에서 돌을 깨고 있는 7살짜리 서르밀라의 얼굴에서 어린아이 특유의 장난기는 찾아볼 수 없다. ‘희망의 언덕’ 제공.
14살 비나가 닷새 동안 모은 모래 더미를 팔아 받은 돈 250루피(약 3750원)를 들어 보이며 그동안의 힘겨운 노동을 잊은 듯 웃고 있다. 하지만 소녀는 짧은 웃음 뒤 다시 힘든 노동의 시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위). 네팔 어린이들이 돌을 깨는 데 쓰는 도구인 ‘짐티’와 망치. ‘희망의 언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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