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 즉 ‘아이엠에프 사태’라 불리던 시절, 한국의 많은 은행 중 절반 이상은 합병 등의 형태로 사실상 문을 닫았다. 당시 인도네시아와 타이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조건이던 ‘부실화된 은행정리’는 논란이 있었지만 잘못된 투자에 대한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수긍해야 했다.
최근 유럽 부채위기 속에서 진원지인 그리스와 유럽의 대형 은행들은 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 그리스는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가혹한 조건 속에서 구제금융을 받고 있고, 그리스에 투자한 유럽 은행들은 문을 닫기는커녕 국제통화기금 등 그리스 구제금융 주체들로부터 일정 정도 투자금 회수를 보장받고 있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29일(현지시각) “유럽 부채위기에 대한 국제통화기금의 대처가 과거 금융위기 때와는 달리 개인투자자들(은행들)한테 관대해, 이중잣대 시비를 부르며 위기를 더욱 끌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통화기금의 이사진 등 고위층들에 유럽 쪽 인사들이 많이 포진해 과거 금융위기 시절 개발도상국에 강요했던 가혹한 처방들을 피하도록 허용하고 있다는 아시아의 경제분석가와 관리들의 비판을 전했다. 최근 선임된 이 기구의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가 그리스 국채에 가장 많이 돈이 물린 은행들을 가진 프랑스의 재무장관 출신인 점도 지적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그리스 부채 문제가 초기에 부상했을 때 그리스 국채에 투자한 개인투자자들에게 투자책임에 따른 손실을 부담했으면 유럽 부채위기는 번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고 신문은 전했다. 유럽의 일부 은행들은 퇴출되었겠지만, 그리스가 더 심한 위기에 빠져들지 않고 유럽 전체도 부채위기에서 절연됐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통화기금 관리들은 이에 대해 “그리스 구제금융 등 유럽 부채위기에 대한 대처는 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과 함께 한 것”이며 “과거와는 사정이 다르다”고 반박한다. 특히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금융위기가 보여주듯, 한 지역의 위기가 다른 지역의 위기로 파급되는 상호연결성은 10여년 전보다 훨씬 높아졌다는 게 이 기구의 주장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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