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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경제

‘달러 대체’ 각광받던 유로 ‘아, 옛날이여’

등록 2010-05-30 17:32

달러·유로 환율 추이 (※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올 유럽 재정위기로 가치폭락 ‘1유로=1달러’ 가능성
한때 ‘양대 기축통화’ 전망…빚더미 드러나며 ‘굴욕’
영광의 시기에는 그에 걸맞는 에피소드도 있다.

<블룸버그뉴스>는 2007년 11월 “수퍼모델 번천이 달러를 버리는 헤지펀드들과 합류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세계에서 가장 수입이 많은 모델 지젤 번천이 모델료를 유로로 받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번천은 이를 부인했지만 달러에는 모욕을, 유로에는 축복을 더해준 일화다.

2008년 6월 유럽중앙은행(ECB) 창설 10돌 축하연에서 장클로드 트리셰 총재는 “유럽인들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고 이제껏 시도된 적 없는 것을 성취했다”며 유로의 성공을 자축했다. 이듬해 1월1일 유로 출범 10돌까지 자화자찬이 이어졌다. 주제 마누엘 바호수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파운드를 고집해 온 영국의 유로존 가입이 임박했다고 주장했다. 공동통화라는 초유의 실험이 통화 안정성과 인플레이션 억제, 무역 증대 등 목표를 십분 달성했다는 게 이들의 평가였다. 경제 수준과 사정이 각양각색인 나라들이 공동통화를 쓰는 것은 넌센스라던 학자들은 반성했다.

대서양 건너에서는 한숨을 쉬었다. 트리셰 총재가 유로의 성공을 말하고 닷새 뒤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강한 달러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며 값어치가 떨어진 달러를 걱정했다. 1.179달러로 시작한 1유로는 2000년 10월 0.825달러까지 떨어지기도 했지만, 이 발언이 나올 즈음엔 최저점의 두배가량인 1.599달러로 향해 가고 있었다. 애초 달러와 대적하려고 1유로를 1달러와 맞먹게 설정한 유로 설계자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유로와 달러가 그리는 가격선이 주목받는 것은 화폐가치 변동 이상의 의미가 담기기 때문이다. 바로 지배적 국제 결제 통화이면서 외환시장 개입의 주요 수단이 되는 기축통화 지위를 둘러싼 경쟁이다. 미국과 인구와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비슷한 유로존 화폐는 2차대전 뒤 달러의 지위를 처음으로 위협하는 통화로 떠올랐다. 지난해 세계 외환보유고에서 달러와 유로 비중은 65% 대 25%를 기록했다. 유로 등장 전 달러와 함께 준비통화로 불린 영국 파운드와 스위스 프랑은 비중이 1~3%에 그쳤을 뿐이었다.

지스카르 데스탱 전 프랑스 대통령의 ‘한’도 조금 풀리는 듯했다. 그는 1960년대 재무장관 시절 많은 나라가 채권 구입으로 미국 경제를 받쳐주는 상황에 대해 “(달러의) 터무니없는 특권”이라는 길이 회자될 말을 남긴 인물이다. 프레드 버그스텐 전 미국 재무부 차관은 지난해 말 <포린어페어스> 기고에서 “(세계 외환보유고에서) 달러와 유로의 비중은 훨씬 더 균형을 이룰 것”이라며 양대 기축통화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했다. 유로의 선전에 감동한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는 동아시아 단일통화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바 있다.

그러나 유로의 운은 일단 여기에서 멈췄다. 그리스 재정위기 여파로 유로는 올해 달러에 대해 16% 싸졌다. 금융시장의 화두는 ‘유로 패권’이 아니라 유로의 밑바닥이 어디까지냐로 바뀌었다. 8년 전 ‘1유로=1달러’ 시대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유럽 지도자들은 지금 사나흘이 멀다 하고 브뤼셀에 모여 대책을 짜내느라 바쁘다. 유로존은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달러 공급에 목을 맸고, 국제통화기금(IMF)에도 손을 벌렸다. <뉴욕 타임스>는 유로를 경제가 반토막 난 1998년 러시아의 루블에 빗댔다.

미국 입장에서도 상황은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최근 유로존이 7500억유로 규모의 금융시장 안정책을 내놓도록 유럽 정상들을 압박했다. 지난해 6월 미국 채권에 넣어둔 중국 국부의 감소를 걱정하는 베이징대 학생들에게 “중국의 자산은 안전하다”며 달러를 변호했던 티머시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도 유럽 재무장관들에게 지침을 내리는 위치에 섰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미국이 86.1%로 유로존(78.7%)보다 심각했다. 그래도 ‘빚더미에 앉은 유럽’이 강조되고 유로가 휘청대는 상황은 결국 달러 패권이 건재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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