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대마불사론’ 뒤에 숨어 ‘응전’
6대은행 자산 미 GDP의 60%…파생상품 등으로 감시 피해 1929년 대공황 뒤 뱅커스터(Bankerster)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은행가(Banker)와 악당(Gangster)을 합친 말이다. 미국인들이 경제의 절반을 날려버린 대공황의 주범으로 지목된 금융인들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표현이다. 월스트리트가 이 전대미문의 사태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설왕설래가 있지만, 적어도 도화선이 됐다는 데에는 경제학자 대부분이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월스트리트가 재앙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은 그보다 훨씬 오래됐다. 이는 경제위기 때마다 미 행정부와 의회가 월스트리트의 고삐를 잡으려 하고, 월스트리트는 다시 대단한 탄성을 보이며 급성장하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예고한 것이기도 하다. 금융의 지나친 집중에 대한 우려는 건국의 아버지이자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퍼슨은 1816년 10대 대통령 존 타일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은행이 상비군보다 위험하다고 진심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제퍼슨은 월스트리트를 “인간성이 실종된 곳”이라고 비난하며 ‘반월스트리트파’의 시조가 됐지만, 이런 목소리는 미국은 물론 세계의 금융 패권을 쥐게 된 월스트리트의 마천루 밑에 당분간 묻히고 만다. 월스트리트는 1907년 금융공황 때 본격적으로 국가적 위기의 진원지로 등장한다. 투기꾼들의 머니게임에서 한 은행이 도산하면서 빚어진 예금 인출 사태(뱅크 런)는 금융공황으로 이어졌고, 미국 정부는 화폐 공급을 통한 위기 예방을 위해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를 설립했다. 금융공황 해결을 위해 두 차례나 제이피모건은행에 손을 벌리는 수모를 맛본 워싱턴의 뒤늦은 조처다. 대공황은 월스트리트의 약탈자 이미지를 굳혔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최초의 증시 규제법인 연방증권법을 만들었다. 이때 여·수신을 전문으로 하는 상업은행과 증권 투자에 집중하는 투자은행의 분리와 정부의 예금 지급 보증을 내용으로 한 글래스-스티걸법도 제정됐다. 감독기구인 증권거래위원회까지 만들어졌다. 미국 금융사상 가장 획기적인 제도 개혁으로 감시망이 촘촘해지면서 사기 거래가 크게 줄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파생금융상품이 인기를 끌며 월스트리트는 다시 한 번 파국으로 이어지는 과열을 준비한다. 대표적인 게 1987년 증시 대폭락을 일컫는 ‘검은 월요일’ 사건이다. 2001년 닷컴 거품 붕괴로 다시 홍역을 치렀지만 과열과 파생금융상품 거래를 감독할 효과적 장치는 마련되지 않았다. ‘파산시키기에는 너무 큰’ 투자은행들을 어쩌지 못한다는 인식이 금융개혁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다 맞은 게 2008년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역대 미국의 금융개혁 시도는 대체로 △황소(월스트리트의 상징)를 다시 가둘 외양간을 고치는 데 민주당 정권이 앞장섰고 △피해 현실화 뒤에야 교정 노력이 뒤따랐으며 △월스트리트의 절대적·상대적 확장에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보였다. 골드만삭스 등 6대 은행의 자산 규모는 1990년대 중반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20%에서 최근에는 60%로 늘었다. <13인의 은행가>라는 책에서 월스트리트의 문제점을 파헤친 사이먼 존슨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와 제임스 콱 전 매킨지 상담역은 230년 미국 역사에서 정부가 월스트리트를 효과적으로 통제한 것은 19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50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월스트리트의 힘이 워낙 커 현재의 금융개혁 시도도 큰 결실을 맺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