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비자가 2021년 11월 26일 베스트바이에서 산 텔레비전을 옮기고 있다. 캔자스주 오버랜드 파크/AP 연합뉴스
미국의 달러가 한 세기에 한 번 있을 만한 강세를 보이고 있다. 기축통화인 달러의 초강세는 세계 경제를 더 불안정하게 만들고 각국 중앙은행의 인플레이션 억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이 18일(현지시각) 지적했다.
다른 통화에 견준 달러의 초강세 현상은 세계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중국 위안은 지난주 달러 대비 약세를 지속해 2020년 이후 처음으로 1달러당 7위안을 넘어섰다. 일본 엔도 올해 들어 달러 대비 가치가 5분 1이나 떨어지자 일본 금융당국이 구두 개입에 나섰다. 유로는 올해 들어 달러 대비 12% 하락했으며, 영국 파운드도 몇십년 만에 기록적인 폭락을 겪었다.
강한 달러의 위세는 신흥국에서 더욱 거세다. 이집트 통화는 달러 대비 18%, 헝가리의 포린트는 20%, 남아공의 랜드는 9.4% 추락했다. 달러 가치를 주요 교역국의 통화 바스켓과 비교해 측정하는 달러 인덱스는 올해 14% 넘게 올라, 1985년 달러 인덱스 도입 이후 가장 많이 올랐다.
달러 초강세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미국 연방준비위(Fed)의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상이다. 달러 표시 자산의 금리가 오르자 전세계 투자자들이 다른 나라 시장에서 달러를 빼내어 달러 표시 자산에 투자하고 있다. 최근 경제 지표를 보면 미국의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높은 수준이어서, 이번 주 연준은 다시 금리를 0.75% 올리는 ‘자이언트 스텝’을 밟을 것으로 시장은 전망하고 있다.
세계 경제 전망이 전체적으로 어두운 점도 달러 강세를 부추기고 있다. 유럽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수급 불안정과 가격 급등 등으로 각종 경제지표에 빨간 불이 들어오고 있다. 중국 역시 자산 거품이 붕괴하며 경제성장의 잠재력이 크게 훼손됐다.
달러 초강세는 미국의 구매력을 높이고 수입물가를 낮춰 미국의 인플레이션 억제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 경제에는 짙은 주름이 되고 있다. 특히 신흥국엔 경제위기 우려가 높아졌다. 세계은행은 15일 세계경제가 침체에 빠져들고 있고 특히 신흥국의 금융위기 위험이 커졌다고 지적했다.
강한 달러는 달러 표시 외채 부담을 증가시킨다. 유엔 무역개발회의(UNCTAD)의 다니엘 무너바르는 “2032년이 되어 갑자기 통화가치가 30% 떨어지면 누구든 늘어난 외채를 갚기 위해 의료·교육비 같은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달러를 주고 사와야 하는 필수적인 식량과 에너지의 수입에 들어가는 돈도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식량이나 에너지 등 원자재 값은 최근 몇 달 사이 정점을 찍고 하락하는 추세지만, 달러 강세로 가격 하락의 혜택도 거의 누리지 못하고 있다.
신흥국들은 강한 달러를 따라잡기 위해 독배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올 들어 30% 가까이 떨어진 자국 화폐 페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15일 금리를 75%로 올렸고, 가나는 지난달 금리를 22%로 올려 투자자들을 놀라게 했다.
곤혹스러운 상황은 유럽도 예외가 아니다. 유로 가치가 전례 없이 떨어지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촉발된 인플레이션 압력을 더 키우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금리를 2.5%로 인상할 뜻을 내비치고 있지만, 당장 유로 가치가 상승 반전할 것이란 기대는 거의 없다. 스위스의 ‘픽테트자산관리’(Pictet Wealth Management)의 프레데릭 두크로젯은 “유럽중앙은행이 매파적인 태도를 취하든 경제전망이 호전되든, 상관없이 추가적인 달러 강세에 의해 상쇄되고 있다”고 말했다.
강한 달러는 미국의 금융가에도 파장을 몰고 오고 있다. 외국 투자 이익을 줄이고 금과 석유 같은 원자재 투자를 억제하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미국의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러스 쾨스터리치는 “당한 달러가 거의 모든 주요 자산에 역풍이 되고 있다”며 이런 상황은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말했다.
달러 초강세를 잡기 위해선 주요 국가들간의 조율된 개입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1985년 미국·일본·서독·영국·프랑스는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떨어뜨린 적이 있다.
박병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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