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14일(현지시각) 남부 휴양도시 소치를 방문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과 회담을 하고 있다. 소치/EPA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벨라루스 정부에 15억달러(1조7600억원)의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한 달 넘게 지속되는 반정부 시위로 퇴진 위기에 몰린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며 힘을 실어준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14일(현지시각) 러시아 남부 휴양도시 소치를 방문한 루카셴코 대통령과 회담한 이후 “우리는 벨라루스인들이 스스로 외부의 조언이나 압력 없이 서로 간의 대화를 통해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것을 지지한다”며 이렇게 밝혔다고 <타스> 통신 등이 보도했다. 푸틴은 이어 “(정국 위기 타개를 위해) 개헌 작업을 시작하자는 루카셴코의 제안은 논리적이고 시의적절한 것”이라고 말했다. 반정부 시위대의 퇴진 요구를 일축하며 정국 위기 해법으로 루카셴코가 제시한 ‘선 개헌-후 대선·총선 실시’ 방안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날 러시아 정부는 벨라루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질 것을 대비해 지난달 국경 인근에 배치한 군 병력 등을 철수한다고 발표하면서도, 앞으로 1년 동안 매달 두 나라 영토에서 연합 군사훈련을 하는 등 벨라루스에 대한 군사안보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야권 지도자들이 사실상 전부 다 투옥·망명한 상황인 만큼 루카셴코 정권이 이번 시위로 전복될 정도는 아니라는 판단 아래 러시아가 군사적 지원보다는 경제적 지원에 초점을 맞춰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향을 드러낸 것이라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러시아로부터 받기로 한 15억달러 차관은 지난달 벨라루스 정부가 루블화 가치 부양을 위해 소진한 금 보유액 및 외화보유액을 살짝 웃도는 금액이다. 코로나19 등으로 가뜩이나 경제 상황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벨라루스가 손 벌릴 수 있는 곳은 사실상 러시아밖에 없는 상황이다. 러시아의 정치 분석가 표도르 루키아노프는 “러시아가 자금을 지원하며 적극 협조하고 있는 점을 볼 때, 러시아는 적어도 현재로써는 루카셴코가 정권을 유지할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의미”라며 루카셴코에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루카셴코의 이번 러시아 방문은 지난달 대선 이후 처음으로 이뤄졌다. 대선 직전까지만 해도, 벨라루스 정국 불안정을 조성하기 위해 보내진 용병이라며 러시아 국적자 32명을 체포하며 러시아와 다소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던 그가 부랴부랴 러시아부터 찾은 건, 그만큼 지지가 절실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푸틴과의 회담 전날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선 10만명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는 등 대선 이후 한 달 넘게 정국 불안정이 지속되고 있는 데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국가들이 부정선거 의혹을 비판하며 제재까지 예고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러시아의 지지가 다급한 그의 처지는,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아내는 모습이나 푸틴 쪽으로 한껏 기울여 앉은 자세 등을 통해서도 드러났다고 <로이터> <아에프페>(AFP) 통신 등이 전했다. 그는 푸틴의 지지 표명에 “대단히 감사하다”고 밝히는 한편, 러시아를 “큰형”이라고 부르며 “최근의 일을 통해 대단히 중대한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한편, 푸틴의 지지 표명에 지난 대선에서 루카셴코와 맞붙었던 야권 후보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는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그는 이날 텔레그램 채널에 올린 성명에서 “러시안이들이여, 당신들의 세금이 우리를 매질하는 데 쓰이고 있다”며 “우리는 당신들도 이를 원치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당신들이 소치 회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것은 법적 효력이 없다”며 “루카셴코와 체결한 모든 조약은 새로운 정권에 의해 재검토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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