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유럽에 실전배치한 B-61 전술 핵폭탄의 모습. 독일 사민당은 미국의 핵우산 체제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연립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중도 좌파 사회민주당(사민당)이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의 적절성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사민당은 독일에 배치된 미군 핵무기의 존속에도 부정적 시각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12일 독일 사민당의 고위 관계자를 인용해, 사민당이 군사·외교·안보 전략에 대한 입장을 재평가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고 보도했다. ‘재평가’ 대상에는 러시아가 유럽을 공격할 경우 독일 군용기가 유럽에 배치된 미군 핵무기를 운반해 반격할 수 있도록 한 기존 ‘핵공유 협정’의 유지 여부도 포함돼 있다.
사민당의 랄프 스테그너 부대표는 지난 11일 당 지도부 회의를 마친 뒤 “우리는 핵공유 협정이 이젠 시대에 맞는다고 보지 않는다”며, 사민당이 F/A-18 전폭기의 구매에 찬성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밝혔다. 사민당의 이런 방침은 연정을 주도하는 중도우파 기독민주당의 정책과 상충될 뿐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의 협약 불이행을 비난하며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탈퇴한 이후 유럽에서 군사적 긴장이 커지고 있는 시점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이후 깊어지고 있는 미국-유럽간 군사동맹의 균열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 독일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중도좌파 사회민주당(SPA)의 전당대회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독일은 동서간 냉전이 뜨겁던 1955년 서방의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하면서 미국의 핵우산 체제에 편입됐다. 현재 유럽에 배치된 미군 핵전력의 구체적 내용은 군사비밀이다. 군사 전문가들은 독일에 20여대를 포함해 벨기에·이탈리아·네덜란드·터키 등 나토 회원국들에 모두 180기 가량의 비(B)-61 전술핵폭탄을 배치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독일이 운용 중인 군용기 중 미국산 핵무기 운반이 가능하다고 인증 받은 기종은 독일제 토네이도 전폭기가 유일하다. 그러나 그 상당수는 생산된 지 40년이 넘어 퇴역 단계다. 메르켈 정부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미국 보잉사의 에프에이(F/A)-18 전폭기 45대를 구매할 계획이다. 이는 미국이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에 군사비 지출 증대를 압박하는 것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메르켈 정부의 한 대변인은 “나토의 핵 억지력을 재론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나토의 방어적 핵전력을 전적으로 계속 지지한다”고 밝혔다. 나토의 한 대변인은 “나토의 핵억지 임무를 지탱하는 데 동맹의 공군은 핵심”이라고 거들었다. 리처드 그레넬 주독 미국 대사도 “나토의 핵전력은 억지와 방어를 위한 동맹의 합의”라며 독일은 의무에 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사민당의 스테그너 부대표는 미국의 군비 압박은 독일이 핵무장과 군비 지출에 대한 근본적 토론을 하게 만드는 의미가 있다고 맞받았다. 사민당의 롤프 뮈체니히 국방정책 대변인도 핵공유가 꼭 핵무기를 유치해야 한다는 걸 뜻하진 않는다며 ‘캐나다 모델’을 거론했다. 캐나다는 나토 회원국이지만 영토 내에 미국 핵무기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17년 3월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면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메르켈 총리가 악수를 제안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외면했다. 워싱턴/EPA 연합뉴스
이런 가운데, 현재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의 시민들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보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더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퓨 리서치센터가 최근 유럽 7개국 시민을 대상으로 ‘국제현안에서 더 올바른 일을 하는 지도자’를 물은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대다수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가장 신뢰하는 지도자로 꼽았다고 12일 <유로뉴스>가 보도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에서 트럼프를 꼽은 응답자는 각각 10%와 9%에 그친 반면, 푸틴과 시진핑의 지지율은 그 2~3배에 이르렀다. 독일과 프랑스 응답자들이 각기 자국이 아닌 상대국 지도자를 지지한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번 조사를 의뢰한 독일의 ‘뮌헨 안보 콘퍼런스’는 “유럽연합은 이른바 ‘새로운 열강 경쟁 시대’에 전혀 준비가 돼있지 않다”고 경고했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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