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현지시각)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 낙태죄 폐지에 대한 헌법 개정 국민투표 결과가 찬성으로 발표되자,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손을 들고 환영하고 있다. 더블린/AFP 연합뉴스
인구의 88%가 가톨릭교도인 아일랜드에서 낙태를 금지하는 헌법 조항을 35년 만에 폐지하기로 했다. <에이피>(AP) 통신은 전날 낙태죄 폐지에 대한 헌법 개정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66.4%가 찬성했다고 26일 보도했다.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권리를 산모의 권리와 동등하게 인정해온 수정헌법 제8조는 폐지되고, 임신 12주 이하는 낙태가 제한 없이 허용된다.
이번 결정은 다른 가톨릭 국가 등 낙태를 처벌하는 국가들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도 24일 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사건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공개변론을 열면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2~3개월 안에 헌재의 판단이 나올 전망이다.
26일 오후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의 더블린성 앞에는 낙태죄 폐지를 축하하는 수천명이 모여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시민들은 “우리가 해냈다”, “우리가 역사를 만들었다”고 외쳤다. 아일랜드 방송협회는 출구조사에서 남성보다는 여성들의 찬성률이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출구조사 결과, 18~24살의 87.6%가 낙태죄 폐지로 뜻을 모았고, 25~34살(84.6%), 35~49살(72.8%), 50~64살(63.7%) 집단에서도 폐지 의견이 다수였다. 65살 이상만 찬성이 41.3%로 반대를 밑돌았다. 리오 버라드커 총리는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조용한 혁명의 절정”이라며 “우리는 여성들을 믿고 그들이 올바른 결정, 자신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아일랜드에서는 낙태 시술을 한 여성에게 최장 14년의 징역형을 내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매년 수천명이 해외로 낙태 수술을 하러 나갔고, 온라인에서 불법 약물을 구입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2013년 산모 생명에 위험이 있을 경우엔 낙태가 허용됐지만, 허용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져 왔다. 정부는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낙태죄 폐지를 묻는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이번 결정으로 낙태가 전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임신 12주 이내 수술은 제한을 두지 않지만, 12~24주 사이엔 태아가 기형이거나 산모 건강에 중대한 위험을 미칠 우려가 있을 경우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을 연말까지 의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수술 전 3일간 숙려 기간을 두고, 의료진의 신념에 따라 환자를 맡지 않을 권리도 법안에 담긴다.
이번 결정은 아일랜드 사회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로도 평가된다. 1983년 수정헌법 제8조 제정 당시 아일랜드 가톨릭교도의 80%는 매주 미사에 참여했지만 지금 그 비율은 20%대로 급락했다.
<뉴욕 타임스>는 유럽에서 우파 포퓰리즘이 급부상하는 시점에 아일랜드가 자유주의적 변화를 잇따라 쟁취했다고 분석했다. 아일랜드는 2015년 국민투표에서 62%의 찬성으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고, 지난해 6월 성소수자인 버라드커가 총리가 됐다.
김미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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