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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유럽 극우 광풍 업고 ‘네덜란드 트럼프’ 맹위

등록 2017-03-09 21:45수정 2017-03-09 22:36

반이민·반이슬람 내세운 자유당
헤이르트 빌더르스 대표 주목
여론조사서 반년째 지지율 선두
‘관용·다양성의 나라’서 이례적

대부분 정당들의 연정 거부에
녹색좌파당 선거 막판 돌풍 겹쳐
집권 여당에 차츰 밀리는 양상
오는 15일 네덜란드 총선을 앞두고 ‘극우’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헤이르트 빌더르스(왼쪽 금발) 자유당 대표가 8일(현지시각) 남서부 도시 브레다에서 선거 유세를 하는 도중 한 시민이 “증오와 공포에는 한 표도주지 말라”고 쓴 포스터를 들어보이며 시위를 하고 있다.  브레다/AP 연합뉴스
오는 15일 네덜란드 총선을 앞두고 ‘극우’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헤이르트 빌더르스(왼쪽 금발) 자유당 대표가 8일(현지시각) 남서부 도시 브레다에서 선거 유세를 하는 도중 한 시민이 “증오와 공포에는 한 표도주지 말라”고 쓴 포스터를 들어보이며 시위를 하고 있다. 브레다/AP 연합뉴스
“우리는 아주 훌륭한 결과를 얻을 것으로 확신한다.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요정이 다시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확실히 유럽에 변화가 올 것이다.”

오는 15일 네덜란드 총선에서 집권을 꿈꾸는 극우 자유당의 헤이르트 빌더르스(53) 대표가 최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그가 말한 ‘우리’에는 네덜란드 자유당뿐 아니라, 다음달 프랑스 대선의 유력 주자인 마린 르펜 국민전선 대표도 포함됐다.

닷새 앞으로 다가온 네덜란드 총선에 유럽 전체의 눈이 쏠려 있다. 올해 들어 유럽 주요국 중에서 처음 치러지는 총선이어서만은 아니다. 네덜란드 총선의 ‘태풍의 눈’인 빌더러스 대표가 이끄는 자유당이 제1당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빌더르스는 노골적인 반유럽연합, 반이민, 반이슬람, 자국민 우선주의를 내세운다. 자유당의 선거 슬로건이 “네덜란드를 다시 우리 것으로!”이다. 빌더르스는 ‘넥시트’(네덜란드의 유럽연합 탈퇴), 무슬림 이민 금지, 모스크와 이슬람 학교 폐쇄를 공약으로 못박았다. 여기에, 소득세와 건강보험 분담금 경감, 국방 및 치안 예산 증액 등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책을 연상시키는 공약이 대부분이다. 그의 별명이 ‘네덜란드의 트럼프’다.

* 누르면 확대됩니다.
빌더르스는 지난달 15일 첫 선거 유세에서 “네덜란드 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모로코인(이민자) ‘쓰레기’들을 치우겠다”는 극단적 선동으로 유권자들의 지지를 구했다. 지난 5일에는 유럽 뉴스채널 <유로뉴스> 인터뷰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의 판매·선전)이 불법인 것처럼, 최소한 네덜란드에서 쿠란을 내버려두지 않겠다”며 이슬람 경전 <쿠란>의 금지를 공식화했다.

네덜란드는 정치·사회적으로 안정된 복지국가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2.1%로, 11분기 연속 성장세를 유지했고, 실업률은 5% 수준으로 완전고용에 가깝다. 텅 빈 교도소를 이웃 나라에 임대해줄 만큼 범죄율도 낮다. 더욱이 성매매, 동성결혼, 마약, 존엄사가 모두 합법일 정도로 개인의 자유와 관용, 다양성이 돋보이는 나라 네덜란드에서 극우 정당이 이처럼 기세를 올리는 건 미국, 영국의 반이민 정서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네덜란드 트로닝언대의 헤릿 푸르만 교수(정치사)는 최근 <에이피>(AP) 통신에 “지금 네덜란드에서 중요한 건 경제가 아니라 정체성”이라며 “빌더르스 대표는 사회에 팽배한 공포심을 이용하려 한다”고 지적했다. 빌더르스를 지지한다는 로테르담의 한 시민(65)은 “외국인들은 모든 것을 다 갖는데, 네덜란드 출신자들은 푼돈으로 살아야 한다”며 “외국인(이주자)들은 벤츠를 타고, 네덜란드인은 푸드뱅크에 음식을 받으러 간다”고 말했다.

양호한 거시경제 지표와는 달리,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속된 긴축재정으로 연금과 복지 혜택 축소, 시간제 고용 증가에 따른 일자리의 질 악화, 빈부 격차 확대 등은 ‘이전과 많이 달라진 것’이다. 최근 네덜란드 무슬림 공동체의 대책회의에 참가했던 전직 교사 뤼디 퀸절은 <유로 뉴스>에 “2008년 자본주의 위기 이후 일자리가 회복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는데, 그들이 소수자들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네덜란드에서 모로코계 무슬림은 전체 인구 약 1700만명의 2%에 불과하다.

극우 자유당의 부상은 온건 보수파인 집권 자유민주당의 ‘우 클릭’에도 영향을 미쳤다. 마르크 뤼터 총리는 지난 1월 현지 신문들에 낸 전면광고에 이민자들을 겨냥해 “네덜란드에 와 누리는 자유를 남용하는 자들 때문에 네덜란드인들이 갈수록 불편하다. 평범하게 행동하든지, 아니면 떠나라”라며 ‘극우’처럼 말했다.

오는 15일 총선에서 연임을 노리는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자유당)가 8일 헤이그에서 유세를 마친 뒤 한 시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헤이그/AFP 연합뉴스
오는 15일 총선에서 연임을 노리는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자유당)가 8일 헤이그에서 유세를 마친 뒤 한 시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헤이그/AFP 연합뉴스
뤼터 총리는 같은 날 일간 <알헤메인 다그블라트> 인터뷰에서도 “선택지가 있다. 싫으면 떠나라”는 메시지를 되풀이했다. 그러자 빌더르스는 곧장 트위터에 “국경 개방, 망명자 쓰나미, 대량 이주, 이슬람화, 속임수의 남자”라는 글을 올렸다. 그 ‘남자’의 이름을 거론하진 않았지만, 보수 성향의 자유당 지지층을 잠식하려는 뤼터 총리를 견제한 게 분명했다.

다당제를 표방하는 네덜란드 하원은 의석 수는 150석에 불과하지만 이번 총선에 후보를 낸 정당만도 28개나 된다. 어느 정당도 과반(76석 이상)을 확보할 가능성은 높지 않고 연정이 일반화돼 있다. 2012년 총선으로 꾸려진 현 정부는 중도우파 자유민주당(41석)과 좌파 노동당(38석)이 주도하는 연립정부다. 지금까진 대부분의 정당들이 극우 자유당의 연정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혀, 자유당이 1당을 차지하더라도 집권당이 될 가능성인 매우 낮다.

그럼에도 자유당이 최다 의석을 확보하거나 제1야당이 되는 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극우 포퓰리즘 세력이 연립정부의 법안과 정책들에 제동을 걸거나 의회에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게 된다. 또 4월말~5월초 프랑스 대선과 5월 영국 지방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대선 1차 투표를 6주 앞둔 프랑스에서도 유럽연합 탈퇴와 반이민·반이슬람을 내세운 극우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후보가 이변이 없는 한 결선에 진출할 것으로 보인다. 또 9월에는 독일과 노르웨이가 총선을 치른다. 네덜란드 자유당이 집권 여부와 상관없이 막강한 정치세력임을 입증할 경우, 주변국의 극우 포퓰리즘도 더 힘을 받을 수 있다. 이번 선거가 단순히 한 나라의 정치적 선택을 넘어 최근 몇년새 유럽에 몰아치는 극우 포퓰리즘과 배타적 내셔널리즘 돌풍의 향방을 가늠할 시금석으로 평가되는 이유다.

유럽 주요국의 극우 득세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유럽과의 전통적 동맹관계의 가치를 저평가하는 것과 맞물려 유럽연합의 결속력을 더욱 흔들어놓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빌더르스 대표는 지난해 11월 <러시아 투데이>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을 ‘혁명’에 비유하며 유럽의 교훈으로 삼자고 말했다. “유럽의 정치도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애국적 봄’이 엄청난 인센티브를 갖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네덜란드 서부 도시 레이던의 시민들이 3·15총선에 후보를 낸 각 정당들의  포스터 벽보를 보고 있다. 레이던/AFP 연합뉴스
네덜란드 서부 도시 레이던의 시민들이 3·15총선에 후보를 낸 각 정당들의 포스터 벽보를 보고 있다. 레이던/AFP 연합뉴스
자유당은 지난 6개월 동안 여러 여론조사기관들이 실시한 60여차례의 조사에서 50차례가 넘게 지지율 1위를 차지하며, 집권 자유민주당과 팽팽한 선두 다툼을 벌여왔다. 그러나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자유당 지지율은 눈에 띠게 하락세를 보인다. 선거분석기관 페일링베이저르가 8일 발표한 조사 결과를 보면, 자유당의 예상 의석수는 한때 30석 안팎에서 지금은 21~25석으로 줄어들고, 집권 자유민주당이 24~28석으로 1당을 차지할 것이란 예측이 나왔다. 자유민주당과 연정 파트너인 노동당(현재 38석)은 이번 총선에선 10석을 겨우 넘길 것으로 보인다. 극우 자유당을 배제할 경우, 좌·우파와 중도까지 5~6개 정당이 참여하는 대연정 구성이 불가피하다. 최대 야당인 자유당의 입김이 커지면서 주요 표결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게 된다는 뜻이다.

선거 막판에 녹색좌파당이 ‘좌파 돌풍’을 일으키며 ‘극우 파도의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은 주목된다. ‘네덜란드의 트뤼도’로 일컬어지는 30살의 예서 클라버르 녹색좌파당 대표는 모로코 출신 아버지와 네덜란드·인도네시아 혼혈 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자유당의 대척점에 있다. 그는 지난 5일 열린 토론에서 “누군가 내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거나, ‘모로코인한테는 투표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우린 출신이 아닌 미래를 바탕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네덜란드는 이민자의 나라이며, 나는 이민의 산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녹색좌파당은 자유민주당, 자유당에 이어 제3당까지 넘보고 있다. 만일 총선 이후 ‘좌파 연정’이 현실화될 경우, 총선 전 ‘네덜란드 우려’가 정반대 현상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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