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체제·엘리트 지배층 불신에
유럽통합 회의감·소득격차 확대
대중영합적 신생 정치세력 약진
급진좌파부터 극우까지 폭 넓어
‘대안 민주주의’ 욕구 분출이지만
반난민·반이슬람 등 파시즘 우려
유럽통합 회의감·소득격차 확대
대중영합적 신생 정치세력 약진
급진좌파부터 극우까지 폭 넓어
‘대안 민주주의’ 욕구 분출이지만
반난민·반이슬람 등 파시즘 우려
“유권자들이 틀린 게 아니다. 유권자들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주류 정당들이 더욱 성공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보여줘야만 한다는 뜻이다.”
네덜란드의 마르크 뤼터 총리는 지난 11일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기성 정당들은 신흥 도전 세력에 밀리는 것을 자책하기만 한다”고 꼬집었다. “독일을 위한 대안(독일대안), 네덜란드 자유당, 프랑스에선 마린 르펜(국민전선 대표)에게 투표하려는 유권자들에 대한 불평은 그만둬야 한다”고도 했다. 중도우파 자유민주당의 뤼터 총리가 언급한 3개국 정당들은 모두 ‘극우 포퓰리스트’로 분류된다.
유럽과 미국 정치에 포퓰리즘 돌풍이 거세다. 미국에선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부동산 재벌 출신 도널드 트럼프(공화당) 대통령 당선자가 다음달 취임을 앞두고 있다. 유럽에서도 최근 몇년새 포퓰리스트 정당들이 거침없이 세력을 키우며 집권까지 넘본다.
서구에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 동안 중도좌파 정당과 중도우파 정당이 번갈아 집권하며 주류 정치세력으로 자리잡았다. 소수당은 양대 정당이 단독 집권에 실패할 경우 연립정부(연정) 구성과 존속의 캐스팅보트를 쥐는 정도에 그쳤다. 이처럼 견고한 양당 체제를 뒤흔드는 포퓰리스트 정당이 주요 선거와 국민투표에서 약진하는 현상은 낯설고 당혹스러운 정치적 지각변동이다.
유럽 포퓰리즘의 스펙트럼은 좌에서 우까지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굳이 나눠보면 급진좌파 정당, 극우 정당, 그리고 전통적 좌·우파 개념에서 벗어나는 진보적 자유주의 운동까지 3가지 유형이다. 각각 지지층과 지향점은 다르지만 탄생 배경은 비슷하다. 최근 몇년째 지속되는 난민 위기와 유로존(유로화 단일통화권) 체제에서 비롯한 경제 주권의 제약이다. 여기에 기성체제와 엘리트 지배층에 대한 불신, ‘세계화’에 대한 피로감, 유럽 통합에 대한 회의, 경기 침체와 심각한 소득격차 등이 더해진다. 의회가 아닌 광장에서 터져나온 목소리에 뿌리를 댄 신생 정당들이 주도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지난 4일 오스트리아의 대선 결선에 유럽과 세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2차대전 이후 최초로 유럽에서 극우정당 대통령이 나올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컸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에선 유럽연합 탈퇴와 강력한 반이민·반이슬람을 내세운 극우 자유당의 노르베르트 호퍼(45) 후보가 ‘통합과 포용’을 주장한 알렉산더 판데어벨렌(72·전 녹색당 대표)를 줄곧 앞섰다. 그러나 투표 결과는 판데어벨렌의 승리였다. 유럽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유럽 대륙의 지도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이탈리아에선 과감한 정치개혁안을 담은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됐고, 집권 좌파 민주당의 마테오 렌치 총리가 사임했다. 개헌안 부결은 렌치 전 총리가 제시한 정치개혁 명분이 극우에서 자유주의 성향을 아우른 포퓰리즘 야당들의 ‘기성정치 심판론’에 좌절된 것으로 평가된다. 코미디언 출신 정치인 베페 그릴로가 2009년 생활밀착형 민주주의를 외치며 창당한 ‘오성운동’은 2013년 총선에서 원내 제3당으로 떠올랐으며, 2018년 총선에서 집권 가능성도 예상된다.
<히틀러 평전>을 쓴 영국 역사학자 이언 커쇼는 지난 6월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통과 당시 <아에프페>(AFP) 통신에 “브렉시트, 극우의 득세, 외국인혐오, 인종주의 등은 모두 (유럽을)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리려는 것으로 극히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이와 반대로 좌파 포퓰리즘으로 분류되는 흐름도 있다. 지난해 12월 스페인 총선에선 창당 2년도 안 된 포데모스가 제3당을 차지했다. 포데모스는 과반 확보에 실패한 1위 보수 국민당과 2위 좌파 사회노동당과의 연정 구성을 거부하면서 양당 체제를 무너뜨렸다. 스페인은 지난 10월 국민당이 소수당 정부로 출범하기까지 10개월 동안 무정부 상태였다. 포데모스는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유럽 재정위기 때인 2011년 과도한 긴축정책에 반대한 ‘분노하라’ 시위가 뿌리다.
지난해 2월 그리스에선 풀뿌리 시민운동으로 출발한 시리자(급진좌파연합)가 총선에서 압승해, 제2차 대전 이후 서유럽 최초의 급진좌파 집권 시대를 열었다. 시리자는 유럽의 구제금융 채권자들이 강요한 극단적 구조조정과 긴축 강요에 맞서 ‘경제 주권’을 주장했다.
이처럼 현재 유럽의 포퓰리즘은 좌우를 막론하고 ‘대의민주주의’의 실패에 대한 불만이 ‘직접민주주의’ 내지 ‘대안민주주의’ 욕구로 분출하는 것이란 분석이 일반적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기획이 필요한 이유다. 지난 10월 아이슬란드 총선에서 표현의 자유와 직접민주주의를 주창하는 해적당이 창당 4년 만에 제2당에 오르며 세계 최초 해적당 집권 시대에 근접했던 것도 상징적이다. 총선 직후 비르기타 욘스도티르 해적당 대표는 “의적 로빈 후드처럼 우리는 권력자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민중에게 돌려주길 원한다”고 말했다.
포르투갈 정치학자 보아벤투라 산투스는 지난해 영국의 비영리 미디어 <오픈 데모크라시> 기고에서 “지금 우리는 어느 때보다 선명히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이면서 사회적으로는 파시스트’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또 포데모스나 오성운동 같은 정치세력을 “새로운 종류의 정당, 즉 운동-정당, 나아가 정당-운동”이라고 표현했다. “지금 같은 정치에 질린 압도적 다수의 시민들이, 꼭 ‘정치적 행동’이 아니더라도, 전례없는 인터넷 상호작용에 기반해, 기업이 아닌 시민의 돈으로 운영되고, 투명성과 책임성을 절대 중요시하며, 밑바닥에서 논의되는 주제들을 (정치권에) 전달하는, 시민 서비스 정당”을 꿈꾼다는 것이다.
독일 사회민주당 싱크탱크의 국제정치 전문가 미하엘 브뢰닝도 지난 6월 미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기고에서 “포퓰리스트의 득세는 기성 정당들의 명백한 정치적 실패에 대한 이성적 반응이며, 공민권 박탈감에 대한 정서적 반발”이라고 짚었다. 그는 특히 “민주당과 공화당의 차이가 큰 미국과 달리, 유럽의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 주류 정당들은 지난 수십년 새 이념적 중도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고 봤다. 즉, 현재 좌우를 넘나드는 유럽의 ‘포퓰리스트 정당’ 흐름이 장기적으로는 급진적 분위기를 걷어내고 안정화되는 형태로 흐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아직까지 ‘포퓰리즘’이란 용어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적 태도’라는 부정적 뉘앙스가 짙다. 정치의 생명줄이 대중의 지지라는 점에서, 포퓰리즘은 원칙적으로는 그 자체로 위험한 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포퓰리즘이 유럽 일각의 극우 정당처럼 ‘타자’를 구별하고 배제하는 집단 이념 형태로 나타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유럽연합 수도인 벨기에 브뤼셀에서 발행되는 시사주간 <뉴 유럽>은 지난 12일 “포퓰리즘, 특히 극우 운동이 유럽을 해치고 파괴하는 것을 멈추리라곤 아무도 장담할 수 없으며, 불행히도 이런 상황은 더 확대되고 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매체는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두렵고 위협적인 것은 그들이 유럽연합뿐 아니라 개별국가 안에서도 분열을 만들기 때문”이라며 “유럽연합이 붕괴되면 낡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팽창주의가 재현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벨기에의 기 베르호프스타트 전 총리(중도우파 플랑드르자유민주당)는 최근 영국 <허핑턴 포스트> 기고에서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은 모든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약속에는 재빠르지만 그 이행에는 곧잘 실패한다”며, 브렉시트 추진 세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사례로 들었다. 그는 “유럽의 많은 포퓰리스트 보수(극우) 정당들은 권력을 추구하면서 원칙을 버린다”며 “포퓰리즘을 물리치기 위해선 유럽(의 주류 정치세력)이 대안적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지난 4일 이탈리아에서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당시 총리가 부결시 사임을 공언하고 추진한 정치개혁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가 부결로 확정된 다음날 새벽, 국민투표에 반대했던 시민들이 로마에서 “헌법을 바꾼다고? 굿바이”라고 쓴 펼침막을 펴들고 기뻐하고 있다. 로마/AP 연합뉴스
지난해 초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의 도심에서 시민들이 유럽 재정위기 국가들에 대한 채권국들의 과도한 긴축 강요에 반대하고 급진좌파 정당 포데모스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위키피디아 갈무리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보수당)가 15일 유럽의 난민위기 대응과 러시아 제재,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을 논의할 유럽연합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건물 앞에 도착하고 있다. 영국에선 지난 6월 보수당이 추진한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대다수 여론조사와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통과되면서 ‘포퓰리즘’ 논란을 낳았다. 브뤼셀/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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