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3일 연방하원 정책 토론회에서 “솔직히 말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티피피·TPP)가 당장 현실화하지 않을 것 같아 언짢다. 그 때문에 누가 이득을 볼 지는 모르겠다”며 불만을 쏟아냈다. 그는 “다만 한 가지는 알고 있다. 앞으로 체결될 무역협정들은 티피피나 (지금 미국과 유럽이 협상중인)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가 담게 될 표준과는 다를 것이란 점이다”고 덧붙였다고 <데페아>(dpa) 통신 등이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자유무역협정 파기 선언에 대한 비난과 우려였다. 이날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메르켈 총리가 4선을 위한 선거운동을 ‘반 트럼프’로 시작됐다”고 평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2일 연방의회의 예산안 심의 토론회에 출석해 상념에 잠겨 있다. 그는 다음날 토론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자유무역협정 폐기 공약을 강하게 비판했다. 베를린/AP 연합뉴스
차기 미국 정부를 이끌어갈 제45대 대통령에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당선하면서, 미국 뿐 아니라 유럽도 ‘트럼피즘’(Trumpism)이란 유령에 떨고 있다. 트럼피즘은 미국 우선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무용론, 보호무역주의, 파리기후협약 무력화, 반이민, 이슬람 혐오, 인권·다양성·소수자 무시, 부자 감세 및 복지 축소 등 트럼프 당선자가 드러낸 태도를 통칭히는 신조어다.
미국의 민간 외교·안보 싱크탱크 <스트랫포>는 22일 웹사이트에 ‘유럽은 메르켈보다 더한 것이 필요하다’는 제목의 분석 글에서“2017년은 유럽이 정치, 금융, 안보 위협에 직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트럼프 당선자 쪽이 예고하는 대외 정책이 특히 미국과 사활적 동맹관계였던 유럽의 지정학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진단에서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23일 런던 도심에서 ‘조속한 탈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런던/EPA 연합뉴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주요국에선 이미 극우파가 크게 득세하고 유럽연합에 대한 회의주의가 팽배하다. 영국은 지난 6월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를 결정했다. 프랑스는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의 프랑수와 올랑드 정부가 4%라는 밑바닥 지지율을 기록하는 가운데, 역시 유럽연합 탈퇴를 공언하는 극우 정당 국민전선이 내년 대선에서 집권을 넘볼만큼 급부상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오는 12월 상원 권한 축소와 정치개혁이 뼈대인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앞두고 있는데, 중도좌파 민주당의 마테오 렌치 총리는 국민투표가 부결되면 사임하겠다고 배수진을 친 상태다. 개헌 투표가 부결될 경우, 유럽연합 탈퇴를 외치며 약진한 신생정당 오성운동이 2018년 총선에서 집권할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어느 경우든 유로존 단일통화 체제의 약화와 유럽연합의 균열이 가속화할 악재가 될 전망이다.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표가 지난 18일 파리에서 열린 ‘메이드 인 프랑스’ 행사에 참석해 선글라스를 끼어보고 있다. 파리/AFP 연합뉴스
이런 가운데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유럽연합의 결속과 진보적 가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다. 메르켈은 지난 20일 집권 기독민주당 회의에서 “민주주의, 자유, 인간과 인권에 대한 존중에 초점을 맞춘” 중도 지향적 기치를 내세워 2017년 총선에서 4선 총리에 도전할 뜻을 밝혔다. 최근 몇년새 온 유럽이 심각한 난민 위기와 경기 침체로 우경화 바람이 거센데다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메르켈과 독일의 역할에 유럽 뿐 아니라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러나 메르켈 총리가 내년 총선에서 4연임에 성공한다 해도 유럽연합이 맞닥뜨릴 과제들은 어느 한 사람이나 한 국가가 다루기엔 너무 버거울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국민전선이나 이탈리아 오성운동이 집권해 유럽연합 탈퇴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려 할 경우, 독일은 파국을 막기 위해 이들 정부와 협상할 것이다. 독일 정부는 동시에 유로존 단일통화 체제의 붕괴에 대비한 비상계획도 가동할 가능성이 크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2017년 총선에선 선거운동의 초점을 ‘유럽연합 통합의 미덕’이 아니라 ‘균열된 유럽연합에서 독일 입지 지키기’로 전환하도록 압박을 받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23일 리투아니아 수도 빌니우스에서 열린 창군 기념식에서 의장대가 행진하고 있다. 리투아니아는 서방 군사동맹인 나토 회원국으로, 최근 러시아가 핵탄두 탑재 미사일을 배치한 역외 영토인 칼리닌그라드와 접경국이다. 빌니우스/신화 연합뉴스
그뿐 아니라 독일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친러시아 정책 및 대외개입 최소화 정책으로 생겨날 동유럽 안보 공백에도 신경을 써야 할 처지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크림반도를 합병하고 발칸 반도에서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등 동유럽에서 공격적 팽창정책을 펼쳐왔다. 또 시리아 내전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지중해와 중동 지역까지 세력권을 넓히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당선자는 선거 운동 기간 중 여러차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러브 콜을 보냈을 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의 ‘관계 재설정’을 공언했다. 러시아를 ‘가상 적’으로 규정하는 유럽의 안보개념 자체가 흔들리는 셈이다. 독일로선 러시아에 대한 제재 강화로 맞서는 것도 쉽진 않아보인다. 트럼프 쪽이 이미 ‘러시아 제재’를 독자적으로 해제할 방침까지 내비쳤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3일 모스크바에서 내외신 기자들에게 발언하고 있다. 모스크바/AP 연합뉴스
트럼프 차기 미국 정부의 보호무역주의도 유럽 최대 경제강국인 독일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 독일이 월등한 제조업 경쟁력에 바탕한 수출 주도형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선 시장 장벽이 없는 자유무역 체제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대다수 회원국이 유로존이라는 단일 통화권으로 묶여있지만 재정정책은 각기 동상이몽이라는 점도 독일을 구심점으로 한 유럽통합의 한계다. 유럽연합은 2013년 금융위기 재발 방지와 금융구조 개혁을 위한 유럽은행연합을 창설했지만 그 기능은 부분적이다. 반면, 독일은 특정 회원국의 금융위기를 막기 위해 유로존 회원국들이 공동 보증하는 국채 발행에는 부정적이다.
여기에다, 유럽연합 28개 회원국의 국내 사정이 저마다 다른 현실도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통합 구상에 도전이다. 예컨대, 지난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유럽연합 회원국들에 시리아 난민을 분산수용할 것을 적극 촉구하고 추진했으나, 상당수 나라들에서 되레 난민 역풍을 불렀을 뿐이다.
유럽 지도. 위치 표시가 된 곳은 러시아가 최근 핵탄두 탑재 가능 미사일을 배치한 역외영토인 칼리닌그라드. 구글 지도
독일 내부의 정치 지형도 복잡해졌다. 집권 기민당과 함께 정치의 양대축을 이루는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이 메르켈 집권 이후 10여년새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틈을 타 반난민과 유로존 탈퇴를 내세운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이 창당 3년만인 지난 9월 지방선거에서 베를린 주 의회에까지 진출하는 등 16개주 중 10개주에 의석을 차지하며 급성장하고 있다.
독일은 2008년 유럽 금융위기 이후 강력한 경제력와 안정적인 정치에 힘입어 유럽연합의 지도적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닥쳐올 불확실성의 시대에도 독일이 단호한 지도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유럽의 정치적 분열이 가속화하면서, 마땅한 동반자 지도국을 찾거나 유럽연합내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스트랫포>는 유럽의 내부 모순과 외부 위협은 독일이 유럽연합 역내에서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도전을 낳고 있다고 짚었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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