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국제 유럽

“지구 반대편 위안부 할머니에 위로와 연대의 마음 보내요”

등록 2016-06-27 16:38수정 2016-06-28 10:23

까미유 쓰농 할머니. 나비의 꿈 미디어지원팀
까미유 쓰농 할머니. 나비의 꿈 미디어지원팀
유럽평화기행 ‘나비의 꿈/쓰농 할머니의 오하두흐 학살 증언
“마을이 불에 탄 연기로 가득…운좋게 살아난 사람은 총으로 쏴
문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차별을 정당화하느냐 아니냐에 있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진심어린 위로와 연대의 메시지를 보낸다. 할머니들 중엔 다시 세상에 나와 증언하시는 분이 있는 것으로 안다. 나 역시 증언의 아픔을 알기 때문에 그분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아픔을 함께 하고 싶다.”

까미유 쓰농 할머니는 오하두흐를 찾는 이들이 원하면 언제든 그들에게 학살의 진실을 증언한다. 19살 때 목격했고, 그로부터 75년 가까이 지났지만 할머니는 아직도 꿈에서건 생활 속에서건 악몽을 꾸곤 한다.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숨이 막힌다. 그럼에도 그가 지금까지 수천 번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은, 진실을 세상에 알려 다시는 이런 학살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지구 반대편 일본군에 의해 처절하게 유린당한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쓰농 할머니는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그때의 진실을 전했다. 다음은 할머니의 증언.

“주말을 맞아 오하두흐에 사는 부모님을 뵙기 위해 전철을 타고 마을로 가던 도중 마을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를 보았습니다. 전철은 갑자기 앞을 막은 군인들에 의해 멈춰졌고, 군인들은 오하두흐가 목적지인 사람들은 내리라고 했습니다. 20여명이 내렸고 그 자리에서 나치군인들이 히죽대며 마을사람들을 모두 죽였다는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당시에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이유는 모르지만 군인들이 우리들을 놓아주었고 우리는 근처 다른마을에 가서 하룻밤을 묵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머물렀던 그 마을에 있는 부모들이 우리에게 오하두흐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아직도 집에 오지 않아 굉장히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근처 작은 마을의 아이들은 학교가 없어 나름 큰 도시였던 오하두흐에 있는 학교로 등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아이들도 모조리 학살당했습니다. 토요일, 두려웠지만 꼭 가야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오하두흐로 간 저는 며칠간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온 마을에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체의 썩는 냄새와 불에 탄 연기로 가득했습니다. 살아남은 몇 명의 사람들은 왜 이러한 악몽이 평화로운 작은 마을에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났는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고 학살의 방법까지 사람들을 속여 한 곳에 몰아넣은 뒤 불을 질러 죽이고 거기서 운 좋게 살아난 사람들을 다시 조준해서 총으로 쏴 죽이는 등 인간이 어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는가에 대해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 경험은 저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지금도 그 악몽에 잠을 설치는 일도 있습니다. 이 트라우마는 나중에 제가 일자리를 구하고 너무도 당연하게 노동조합과 만나게 되면서 그 많이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성인권의 문제 사회적 약자가 만들어지는 구조의 문제 등등 이런것들을 배워나가는 과정이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었습니다.전범재판이 열렸지만 기소된 60여명중에 21명만 법정에 세울 수 있었고 이 조차도 명령을 내렸던 사람들은 숨어버렸습니다. 법정에 선 사람들도 7명 외에는 나치 점령하게 있던 알자스로렌지방의 프랑스인 출신들이었습니다. 결국 프랑스 내 알자스 차별문제로 불똥이 튀게되며 나중에 다 사면받게 되었습니다.”

“힘든 몸에도 이렇게 제가 나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증언을 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희망을 주고받으며 나는 이것을 극복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증언은 과제이자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인에 대한 개인적은 분노는 없습니다. 증언하며 이것이 감정적인 방향으로 가선 안 되고, 전범재판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나치즘에게 가장 먼저 희생된 것은 독일 민족입니다. 독일에 있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조합 활동가 등이 가장 먼저 학살하거나 강제 수용 당했습니다. 그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할머니가 거듭 강조한 것은 히틀러가 법절차에 따라 권력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히틀러도 민주주의를 통해 합법적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문제는 민주주의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차별을 정당화 하느냐 아니냐입니다. 차별의 정당화 속에서 나치즘은 태동했고, 전쟁 범죄가 저질러졌고, 학살도 이루어졌습니다.”

나비의꿈 미디어지원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억으로만 남은 오하두흐 마을

희생자 642명 중 철부지 아이들만 193명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4백여 km 떨어진 오하두흐 쉬흐 글란은 기억 속의 마을이다. 교과서에는 존재하지만, 실재로는 사람이 한 명도 살지 않는다. 마치 고대 도시의 유허 같다. 그곳에 존재하는 건 기둥과 벽면 등 건물 잔해뿐.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에서 뼈대만 남은 시청 건물 같은 뼈대만 남아 있다.

고대 유물일까? 건물 안을 보면 거의 예외없이 재봉틀이 녹슨 채 그대로 있다. 어떤 집에는 자가용 잔해가 새빨간 녹을 뒤집어 쓴 채 구겨져 있다. 오하두흐 마을이 그렇게 사라진 것은 오래지 않은 과거였던 것이다. 대규모 폭격이 아니라 섬세하고 집요한 공격으로 이 마을의 모든 생명은 살해됐고, 그들의 삶과 꿈을 보듬어주었던 집은 그렇게 파괴된 것이었다.

1944년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독일군은 퇴각한다. 6월10일 리모쥬를 거쳐 후퇴하던 독일군 1개 중대 정도의 병력은 리모쥬에서 29km 떨어진 오하두흐 마을에 진입한다. 여인과 아이들은 마을 동쪽의 교회에 몰아넣었고, 성인 남자들은 농가 안이나 짚더미 근처로 끌고 갔다. 잠시 후 기관총과 개인화기가 불을 뿜었고, 총소리가 그치자 화염이 치솟았다. 화기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성당 첨답의 종이 녹아 떨어졌다. 잠시 후 폭탄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그나마 남아 있던 지붕은 그와 함께 모두 무너져 내렸다.

지금까지 독일군이 왜 그랬는지 아무도 모른다. 누구의 지시로 대부분이 아이들과 여인들인 주민들을 그렇게 학살했는지도 모르고, 마을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다만 리모쥬를 중심으로 죠르주 굉굉의 지휘 아래 레지스탕스 활동이 거셌고, 독일군조차 레지스탕스를 두려워할 정도로 저항활동의 거점이었던 것이 그 원인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몰살할 수 있을까. 642명의 희생자 중엔 철부지 아이들만 193명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보르도 전범재판소에서 오하두흐 학살자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조사 결과 65명 정도의 독일군이 학살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23명이었다. 그것도 6명만 독일 출신이고 나머지는 당시 프랑스 영토였던 알사스 로렌 지방 출신의 징용된 병사였다. 명령 계통에 있었을 군인은 하사관 등 하급 지휘자 2명 뿐이었다. 45명 중 21명이 기소됐는데 13명이 알사스 로렌 출신의 18살 강제 징용자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드골은 오하두흐 학살이 ‘나치 야만의 거부할 수 없는 증거’라고 규정했고, 오하두흐의 폐허를 그대로 보존하도록 했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추모시설이 세워졌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진실은 묻혀진 채, 프랑스는 1963년 사면법을 공포했다. 그 결과 학살과 파괴를 지시한 자들은 대부분 편안한 삶을 살다가 침대에서 마지막 숨을 거뒀다. 반면 억울하게 학살당한 이들은 지하에서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으며, 그 유족들은 지금도 학살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전후 처음으로 2013년 6월 독일연방 대통령이 오하두흐 마을을 찾았고,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학살의 전당이 되어 버린 오하두흐 성당에서 그를 맞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치는 오하두흐의 진실에 대못을 박으려 했다. 사회당 정부는 추모관의 예산을 깎아 가이드를 두지 못하도록 했다. 이곳을 찾는 외국인들은 그저 프랑스어로 된 안내판으로 진실을 더듬을 수밖에 없다.

유족들의 가슴엔 이런 배지가 달려 있다. “옹 라쉬 리엥(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성당 입구 벽면엔 이런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오하두흐성당, 침묵하라. 이곳에서 여성과 아이들이 나치에 의해 학살당했다.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위해 추모하고 기도할 것이니.”

“폐허가 된 마을, 밖에는 십자가의 그리스도, 안에는 성모마리아, 그대 고통받는 이들이여, 평화 안에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라.”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국제 많이 보는 기사

트럼프 “북한은 이제 ‘핵보유국’…김정은, 내 귀환 반길 것” 1.

트럼프 “북한은 이제 ‘핵보유국’…김정은, 내 귀환 반길 것”

“바이든이면 이럴 수 있겠나”...트럼프, 행정명령 폐기 서명 펜 ‘투척 쇼’ 2.

“바이든이면 이럴 수 있겠나”...트럼프, 행정명령 폐기 서명 펜 ‘투척 쇼’

이란 가수, 신성 모독 혐의로 사형 선고…항소 가능 3.

이란 가수, 신성 모독 혐의로 사형 선고…항소 가능

트럼프 “근본 완전히 붕괴”…전 정권 비난으로 채운 취임사 4.

트럼프 “근본 완전히 붕괴”…전 정권 비난으로 채운 취임사

머스크, 나치식 경례로 트럼프 찬사…“충격적 행동” 5.

머스크, 나치식 경례로 트럼프 찬사…“충격적 행동”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