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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처칠, 그리스에서 레지스탕스 손에 폭살될 뻔 했다”

등록 2014-11-30 15:30수정 2014-11-30 19:15

유럽의회 최연로 의원 글레조스 70년 만에 ‘옵저버’에 공개
그리스 좌파 독립투쟁 세력, 마지막 순간에 작전 명령 취소
윈스턴 처칠
윈스턴 처칠
“그랑드 브르타뉴 호텔 본부를 날려버리려는 음모에 대해 들어본 적 있을 거요. 날 생각해서 그랬다고는 생각지 않소. 솜씨가 대단히 뛰어난 자들이 하수관에 다이너마이트 1톤을 설치했소.”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12월 크리스마스, 영국 전시내각의 윈스턴 처칠 총리는 아내에게 이런 전보를 쳤다.

처칠이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했다가 하마터면 그리스의 좌파 계열 레지스탕스에게 폭살될 뻔 했던 비화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그해 10월 말 나치 독일군이 그리스에서 퇴각한 뒤, 영국이 그리스 독립투쟁을 주도한 좌파 독립투쟁 세력을 무력으로 탄압하고 나치에 부역한 우파 세력을 지원한 것이 화근이었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주축이었던 민족해방전선(EMA)이 이 호텔에 주둔해있던 영국군 사령부를 제거해버리려 한 것이다.

‘솜씨 뛰어난 자’들에는 그리스의 대나치 투쟁 레지스탕스 영웅인 마놀리스 글레조스(92)도 포함돼 있었다. 현재 유럽의회의 최연로 의원인 글레조스가 70년만에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30일 발간된 영국 일간 <가디언>의 일요판 <옵저버>에 털어놨다. 그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걸 말해주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나는 몸에 다이너마이트 도화선을 칭칭 감고 잠입한 뒤 풀어놓아야 했습니다. (폭파 작전에) 약 30명이 투입됐어요. 하수관 터널을 통해 작업을 했는데 소리를 들킬까봐 몹시 긴장했지요. 구역질나는 시궁창을 기어들어가 호텔 바로 밑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했습니다.”

온 몸에 분뇨와 오물을 뒤집어쓴 대원들이 하수관에서 모두 빠져나왔다. 다이너마이트는 “건물을 통째로 하늘 높이 날려버릴만큼” 충분한 분량이었다. “폭발물 설치에 2시간, 되돌아나오는 데 2시간이 걸렸어요. 이제 폭파는 시간 문제였지요.”

그러나 예상치 못한 운명이 이들의 계획을 뒤틀어놓았다. 폭파 직전에, 처칠이 영국군 사령부가 있는 이 호텔을 방문했다는 첩보가 입수된 것이다. “기폭장치를 손에 쥔 채 (발파) 신호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끝내 발파 명령은 내려오질 않았어요. 그 마지막 순간에, 처칠이 호텔 건물 안에 있다는 걸 민족해방전선(EMA) 지도부가 파악하고 공격 취소 명령을 내렸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적어도 10차례나 나치의 암살 시도를 모면했던 처칠이 또 한번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목숨을 건지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는 ‘호텔 폭파 시도’ 사건이 하수관에 설치된 다이너마이트가 발견되면서 불발에 그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글레조스에 따르면 폭파 미수는 ‘작전 실패’가 아니라 ‘작전 중지’였던 셈이다.

“민족해방전선은 로널드 스코비 영국군 중장이 주둔한 영국군 사령부를 날려버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빅 3’(아이젠하워, 처칠, 스탈린) 중 한 명을 암살하는 데 따른 책임까지 지는 걸 원치는 않았어요.” 스코비 중장은 독일군이 물러난 그리스를 그리스공산당이 장악하지 못하도록 처칠이 그리스에 심어놓은 인물이었다.

이런 비화에는 영국이 자국의 이해 관계에 따라 전후 그리스 정치를 좌우하려던 계획과 그리스 좌파 세력간 첨예한 갈등이 깔려 있었다. 영국의 처칠과 옛소련의 스탈린이 전후 질서 재편을 놓고 협상과 밀약을 나누던 때였다. 나치를 몰아낸 그리스가 새 나라 건설 대신 좌우파간 내전이라는 비극으로 내몰리는 씨앗이 뿌려진 시기이기도 했다. 영국의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언론인 크리스 하먼은 국내에도 번역된 저서 <민중의 세계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리스에 진주한 영국이 옛 군주제를 강요하려 하고, 불신을 받던 옛 지배계급 출신 정치인들로 정부를 꾸리려 한다는 것을 EMA-ELAS(민족해방전선인민해방군)은 알고 있었다 (…) 1944년 12월 초, 정부는 전국의 레지스탕스에 즉각적인 무장 해제를 요구했고, 그에 항의해 아테네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를 기관총으로 진압해 28명을 쏴죽이고 많은 사람을 다치게 했다. EMA-ELAS는 반격할 수밖에 없었고, 영국군 장교들은 자신들이 궁지에 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뒤, 나치에 저항했던 그리스 좌파 레지스탕스 세력은 숙청과 탄압의 비운을 맞게 된다. 영국의 그리스 내정 개입은 그리스가 ‘적화’되는 것을 막으려는 처칠의 편집증 때문이었다. 옛소련 세력이 지중해에까지 미칠 경우, 영국으로선 식민지 인도로 통하는 핵심 항로의 안보가 위태로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리스어로 ‘데켐브리아나’(12월 사건)으로 불리는 1944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33일 동안, 1만2000여명의 민족해방전선 대원들과 수천명의 좌파 세력이 체포돼 영국 식민지인 중동의 수용소나 에게해 군도의 외딴 섬에 수용됐다. 영국이 히틀러의 나치즘에 협력했던 그리스 부역 집단을 돌봐줌으로써 그리스를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지켜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라고 <옵저버>는 평가했다.

그리스 좌파의 레지스탕스 투쟁은 그리스 여성가수 해리스 알렉슈가 부른 ‘기차는 8시에 떠나네’라는 제목의 노래로도 유명하다. 나치와 싸우러 카테리니로 떠나 돌아올 줄 모르는 애인을 기다리는 애절한 여심이 담긴 곡으로, 우리나라의 디바 조수미를 비롯한 수많은 가수들이 따라 불렀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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