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 7일 개막하는 러시아 소치 겨울올림픽에 미국 스노우보드 선수로 출전하는 그레그 브레츠는 자신을 응원하러 올 가족들을 위해 개인 경호원을 고용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 등이 올림픽 기간에 소치를 방문할 예정인데, 테러 위협이 워낙 크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를 사양했다. 러시아 치안이 미더워서가 아니다. 그는 “내 생각엔 테러리스트들이 저격수를 써서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만약 무슨 일을 벌인다면 모든 걸 폭발시켜 날려버릴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최근 러시아 볼고그라드 연쇄 자폭 테러 등을 고려할 때 개인 경호원을 써봐야 소용없으리란 얘기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24일 “올림픽 출전 선수와 가족들의 테러 공격에 대한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미 올림픽위원회는 선수와 가족들에게 올림픽 경기장 밖에서 ‘유에스에이(USA)’ 표식이 있는 복장을 하지 말라고 권고한 상태다. 미 국무부는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잠재적 테러 위험을 바짝 경계하라고 경고했다. 미 의회도 소치로 가는 미국인 1만여명의 안전을 우려했다. 이러다 보니 일부 선수와 가족들은 치안 불안 때문에 소치에 숙소를 정하는 것도 꺼린다. 이들은 소치와 맞닿은 흑해 연안에 떠있을 물 위의 미국 크루즈를 숙소로 이용할 예정이다. 일부 선수 가족들은 소치에서 경기 참관만 할 뿐 관광은 아예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영국 정부도 자국인 소치 방문자들에게 테러 위협을 경고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등은 소치 겨울올림픽과 관련해 테러를 하겠다고 위협하는 전자우편을 받아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체첸·다게스탄 반군 위협 수위 높여
자폭테러용 몸에 감은 폭탄 공개도
러 당국, ‘검은 과부’ 긴급수배령
용의자 수색·사살 등 강경대응
미국, 비상 대비 흑해에 군함 파견
연안 유람선 선수단 숙소로 정해
‘USA’ 쓰인 복장도 입지 말도록 권고
소치 올림픽 치안에 최대 위협 요소로 떠오른 것은 체첸과 다게스탄 분리주의자인 이슬람 반군 조직들이다. 소치는 흑해 연안 도시로 이슬람 분리주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러시아와 기나긴 유혈의 역사를 쌓아온 체첸 공화국과 다게스탄 공화국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러시아 최대 이슬람 반군 단체인 캅카스 에미리트가 지난해 7월에 동영상을 통해 소치 겨울올림픽을 테러 대상으로 삼겠다고 밝힌 게 이런 사정과 관련이 있다. 다게스탄 분리주의 이슬람 조직이자 캅카스 에미리트의 하부조직이기도 한 빌라야 다게스탄은 19일 동영상을 올려 볼고그라드 연쇄 자폭 테러를 자신들이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캅카스 에미리트의 수장이자 ‘체첸의 빈 라덴’이라고 불리는 도쿠 우마로프는 지난해 7월 동영상에서 “모든 무자헤딘(이슬람 전사)과 다른 백성들은 흑해 연안의 우리 영토에서 죽어서 묻힌 수많은 무슬림과 우리 조상의 뼈를 딛고 사탄 숭배자의 올림픽 게임이 열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성전’을 촉구했다.
빌랴트 다게스탄은 19일 술레이만과 압두라흐만이라고 신원을 밝힌 두 남자가 볼고그라드 자폭 테러 이전에 찍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49분짜리 범행 주장 동영상을 공개했다. 미국 <시엔엔>(CNN)은 이를 “무덤에서 나온 위협”이라고 묘사했다. 이들은 러시아어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겨냥해 “당신들이 올림픽을 연다면 우리는 세계에 무고한 무슬림의 피를 흘리게 한 것에 대한 선물을 주겠다”며 “이곳에 오는 관광객 또한 선물을 받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자폭 테러를 준비하고 있다고 주장한 이들은 몸에 감은 폭발물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단체는 소규모 게릴라 조직의 느슨한 연합체에 가깝다. 이들은 볼고그라드 테러가 부분적으로는 상부조직 지도자인 우마로프의 명령으로 수행됐지만 그가 이번 공격을 특정해 지시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러시아 당국은 이들의 범행 주장을 입증할 정보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이 범행한 게 맞다면 소규모 점조직이 소치 올림픽 기간을 전후해 이런 방식의 자폭 테러를 또다시 시도할 가능성은 적지 않다. 러시아는 15일에 자폭 테러를 감행할 위험이 큰 다게스탄 출신 22살 여성 루잔나 이브라기모바를 긴급 수배했다고 영국 <비비시>(BBC)가 20일 전했다. 그는 지난해 다게스탄에서 무장 반군인 남편을 잃은 ‘검은 과부’다. 2002년 모스크바 극장 인질 사건, 2005년 북오세티야 베슬란초등학교 인질 사건 등 체첸인들이 벌인 주요 테러 현장엔 원한을 품은 검은 과부가 어김없이 등장했다. 이브라기모바도 지난해 다게스탄에서 벌어진 경찰과 반군의 총격전에서 남편을 잃었으며, 캅카스 에미리트와 연계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말고도 다른 검은 과부가 소치에 잠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테러 위협은 산발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최근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의 올림픽 팀은 출전하면 테러 공격을 당할 것이라는 위협 전자우편을 받았다. 이런 메시지는 ‘장난질’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지만 선수단과 가족의 불안감은 한층 더 커졌다. 미 국방부는 최근 소치 겨울올림픽에 대비해 흑해 연안에 자국 해군 군함 두대를 정박시키고 테러 발생 때 비상 구출 계획을 마련하는 등 보안 조처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불안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있다.
러시아는 사상 최대 보안 인력을 소치 올림픽에 투입해 치안 확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소치 주변에 ‘철의 울타리’를 친 것으로 알려진 군경 인력만 3만7000여명에 이른다. 17일 다게스탄 수도 마하치칼라의 한 식당에 이슬람 반군 지원 거부에 대한 보복 테러가 일어나자, 러시아 당국은 하루 뒤인 18일 인근 주택가를 공격해 검은 과부를 비롯한 테러 용의자 7명을 사살하는 등 강경 대응을 이어가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소치 겨울올림픽에 대해선 온갖 비판이 있지만 테러 같은 비극이 닥치지 않는 한 푸틴의 리더십을 비준하는 승리의 나팔소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다. 이제 2월7일 개막일이 코앞에 다가왔다. 소치 올림픽을 준비하는 쪽이나 막으려는 쪽이나 상대의 담력을 시험하며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치킨 게임’의 시작됐다.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