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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연주해주세요, 난 당신 거예요’

등록 2012-07-06 15:18수정 2012-07-06 22:23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바로 앞 템스강변에 놓인 피아노에서 한 소년이 베토벤 소나타 월광 3악장을 능숙하게 연주하고 있다. 강변을 산책하던 이들과 다리 위를 건너던 관광객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지켜보았다. 런던의 ‘길거리 피아노’는 13일까지 계속된다.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바로 앞 템스강변에 놓인 피아노에서 한 소년이 베토벤 소나타 월광 3악장을 능숙하게 연주하고 있다. 강변을 산책하던 이들과 다리 위를 건너던 관광객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지켜보았다. 런던의 ‘길거리 피아노’는 13일까지 계속된다.
[토요판] 르포
런던의 ‘길거리 피아노’ 프로젝트
삭막한 도시인이여, 나를 매우 쳐라
“어이 피아노맨, 노래 한 곡만 해주지.” 빌리 조엘의 전설적 팝송 ‘피아노맨’을 기억하시는가. 영화배우가 되고 싶지만 술이나 따르는 바텐더 존, 평생 군인으로 지낼 것 같아 우울한 데이비…. 모두 술 한잔 들이켜며 노래를 청한다. 고단한 삶을 잊기 위해. 선술집 한켠에서 외로운 영혼을 달래주던 ‘피아노’가 거리로 나왔다. 지금 당신이 머무는 도시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세계를 누빈 600대의 피아노가 빚어낸 잔잔한 감동을 함께 느껴보시라.

“베토벤 같은 세계적 거장이든
일 년 정도 레슨을 받았든
누구나 피아노 의자에 앉아
당신의 손가락으로 말하면 된다”
 

유명 관광지와 기차역·공원 등
런던 50곳에서 ‘소통’의 도구로
미국·스페인·브라질·호주의
주요 도시에서도 호응 얻어
오는 10월엔 중국 항저우로
  
 

‘나를 연주해주세요, 난 당신 거예요.’(Play me, I’m yours.)

지난달 30일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바로 앞 템스강변에는 피아노 한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얼핏 보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처럼 어색해 보였다. 피아노가 길바닥에 있다니 그럴 만도 했다. 겉모양부터가 독특했다. 여느 피아노와는 달리 알록달록한 색깔의 꽃과 나비 그림으로 화려한 치장을 했다. 건반 위에 새겨진 문구도 인상적이다. 누구든지 자기 거라 생각하고 마음 놓고 연주하라니. 마치 피아노 한 대를 선물받은 기분이 들게 했다. 피아노를 바라보고 놓여 있는 돌계단은 ‘객석’이 됐다. 지친 다리를 잠시 쉬어 가려고 앉았지만 누군가 한 곡 연주해줬으면 하는 기대로 사람들은 쉬이 자리를 뜨지 않았다.

설치미술가 루크 제럼의 ‘빨래방’ 아이디어

때마침 한 영국 소년이 피아노 의자에 앉는다. 피아노 페달에 다리가 겨우 닿는 작은 키다. 모두들 대수롭지 않게 바라봤다. <엘리제를 위하여>나 <젓가락 행진곡>쯤 듣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천천히 두 손을 가다듬던 소년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월광> 3악장을 능숙하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의 현란한 움직임에 객석은 모두 숨죽였다.

“와아~.” 순식간에 갑절로 불어난 관객들 사이에선 탄성이 새어 나왔다. 강변을 산책하던 이들은 물론이고 다리 위를 건너던 관광객들도 발걸음을 멈췄다. 강변길이 지나다닐 틈도 없이 꽉 막혀버리자 뒤늦게 인근을 순찰하던 교통경찰까지 출동할 정도였다.

앙코르 요청에 무려 3곡을 연거푸 친 주인공은 조지 하를리오노(11)였다. 연주가 끝나자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다. 조지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칠 수 있다니 정말 기쁘다”며 수줍게 웃었다. 피아노를 배운 지는 4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유명한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릴지도 모를 아이에게 사인을 해달라는 이들도 보였다.

피아노는 쉴 틈이 없었다. 조지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스티븐 리들리(23)는 거리의 피아노에 딱 어울리는 이력으로 눈길을 끌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이 만든 곡을 노래하는 거리의 음악가가 되고 싶어 지난해 다니던 은행을 그만뒀다. 그는 “지루한 업무와 강요된 인간관계 맺기 등 짧았던 직장생활이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고 했다.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할 때 무척 흥겨워 보였던 그의 모습과 대비됐다.

피아노 의자에 앉은 그의 등엔 8.99파운드(약 1만6000원)짜리 자신의 음악 시디(CD)를 사달라는 글귀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리들리는 최근 절친한 친구와 그의 어머니가 동시에 암 진단을 받은 뒤부터 영국 암연구센터(Cancer Research UK)의 활동을 돕는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 다가오는 주말에는 24시간 동안 쉼없이 연주하는 ‘피아노 마라톤’에 나설 참이다. 그는 “나는 의사도 아니고 연구자도 아니기 때문에 피아노를 치는 것으로 도울 것”이라며 “쉬지 못해서 경련이 많이 일겠지만 이번 연주로 암 연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싶다”고 밝혔다. 이날 리들리가 연주한 템스강변길의 피아노가 그의 도전에 쓰인다.

일명 ‘길거리 피아노’(street piano)는 이곳 말고도 런던의 랜드마크 50곳에서 볼 수 있다. 테이트모던과 타워브리지, 세인트폴 대성당 같은 유명 관광지뿐 아니라 기차역과 공원, 시장 등 피아노가 놓인 장소도 다양하다. 2008년 영국 버밍엄에서 처음 등장한 길거리 피아노는 지금까지 브라질과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스위스, 스페인 등의 주요 도시에서 모두 600대가량이 선보였다.

이 ‘엄청난’ 프로젝트는 영국 설치미술가 루크 제럼의 ‘소소한’ 일상에서 나왔다. 어느 날 자신이 정기적으로 다니던 빨래방에서 떠올린 생각이 단초가 됐다. 매주 똑같은 사람들이 빨래방에 오지만 어느 누구도 서로 말 한마디 걸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삭막한 도시 곳곳에 이런 ‘침묵의 커뮤니티’들이 얼마나 많을까로 생각이 번졌다. 고민 끝에 제럼은 해결책의 하나로 피아노를 떠올렸다. 공공장소에 피아노를 갖다놓고 이를 함께 즐기게 하면 사람들 간의 대화도 촉진되고 교류도 많아질 거란 생각에서다. 이를테면 피아노를 ‘소통’의 도구로 삼자는 제안이었다.

2010년 뉴욕 타임스퀘어(루크 제럼 제공)
2010년 뉴욕 타임스퀘어(루크 제럼 제공)
뒤에 서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공식 프로젝트명은 ‘플레이 미, 아임 유어스’다. 피아노에 새겨진 문구 그대로다. 길거리 피아노를 수집하고 관리할 예술단체들과 아이디어를 낸 제럼이 파트너십을 이뤄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보통은 도시마다 축제가 열리는 기간을 이용해 2~3주가량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피아노를 가져다 놓는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지역 단체 혹은 학교에 피아노를 기증한다. 피아노는 대개 값이 저렴한 중고 피아노를 사들이지만 일부는 기부를 받기도 한다. 각 도시의 예술가들이 독특한 디자인으로 길거리 피아노에 새 옷을 입히는 것도 관례가 됐다.

길거리 피아노는 2010년 6월 마이클 블룸버그 미국 뉴욕시장이 이 프로젝트를 의욕적으로 유치하면서 한층 유명세를 탔다. 덕분에 60대의 피아노가 뉴욕 전역에 깔렸다. 블룸버그 시장은 “당신이 베토벤과 같은 세계적 거장이든 혹은 나처럼 일년 정도밖에 레슨을 받지 않았든지 간에 문제 될 게 없다”며 “누구나 피아노 의자에 앉아 당신의 손가락이 말하고 싶은 대로 치면 된다”고 강조했다.

이번에 런던에는 ‘시티오브런던 페스티벌’이 시작된 지난달 24일부터 피아노가 거리에 놓였다. 모두 50대의 피아노는 13일까지 런던에 머물 예정이다. 프랑스 파리(6월23일~7월8일)와 미국 세일럼(7월13~29일), 캐나다 토론토(7월10~31일), 스위스 제네바(7월1일 종료), 미국 솔트레이크시티(6월30일 종료) 등도 최근 길거리 피아노가 선보였거나 조만간 놓일 도시들이다.

블룸버그 시장의 말처럼 피아노를 아주 잘 치는 사람만 의자에 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한번도 피아노를 쳐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건반 한개 한개를 신기한 듯 눌러보고 지나가기도 한다. 런던 채링크로스역 인근 빅토리아임뱅크먼트 공원에서 만난 아일랜드 출신의 간호사 재키는 “한번도 피아노를 배워본 적은 없지만 이렇게 뒤에 서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이번 행사를 시작하면서 주최 쪽은 피아노가 놓인 길거리에서 공짜 피아노 강습을 해주기도 했다. 새로운 시도였다.

피아노에 얽힌 사연 하나쯤 없는 사람이 있을까. 세인트폴 대성당으로 가는 길목인 피터스힐에는 독일에서 온 패트릭 던(80) 할아버지가 우두커니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돈을 모아 생애 첫 피아노를 샀을 때의 흥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벌써 50년도 더 된 일이다. 비록 판지상자를 만드는 공장 노동자로 살아왔지만 그에게 피아노는 헤어지지 못하는 ‘애인’과도 같이 평생을 함께했다. 자신이 꿈꾸던 피아니스트의 삶은 아들이 대신 이뤘다. 노구에도 능숙한 솜씨를 보인 할아버지의 연주가 끝나자, 주변에서 지켜보던 젊은 관광객 서너명이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낸다. 세대를 넘어선 교감은 평범한 피아노 한 대를 두고 이렇게 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상파울루 기차역 어느 모녀의 이야기

그동안 각 도시에서 있었던 각종 사연은 길거리 피아노 누리집(www.streetpianos.com)에 빼곡히 기록되고 있다. 피아노를 연주했거나 들었던 이들은 자신들의 사진과 동영상, 후기를 올리면서 ‘그날’의 추억을 공유한다. 마치 피아노를 소재로 한 ‘페이스북’과 같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두 남녀 기자는 이 프로젝트를 각각 취재하러 왔다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다. 길거리 피아노에 감명받은 뉴욕의 한 청년은 자신의 피아노를 직접 들고 미국 일주에 나섰다. 런던의 한 뮤지션은 길거리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재능을 인정받아 피아노를 기부받았다. 일년 뒤 그는 영국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가 됐다. 제럼은 “거리의 피아노들이 비어 있는 음악 캔버스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표현하는 데 인색했거나 그럴 여유를 갖지 못한 이들이 그 공간을 자신들의 이야기로 채웠으면 한다는 것이다.

피아노가 귀한 일부 도시에선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2008년 브라질 상파울루에 길거리 피아노 13대가 놓였을 때의 일이다. 이곳에선 피아노 값이 어떤 이의 1년치 봉급에 맞먹는다. 빈부격차가 극심한데다 피아노가 대중화되지 못하고 부유층의 전유물로 자리잡은 결과였다. 덕분에 피아노를 한번도 못 본 이들이 적지 않았다. 길거리 피아노가 도심에 놓이자, 두세시간 차를 타고 보러 오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휴대전화를 걸어 피아노 연주를 들려줬고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들까지 주변의 도움을 얻어 피아노를 찾았다.

2008년 브라질 상파울루 (카이오 부니 제공)
2008년 브라질 상파울루 (카이오 부니 제공)
당시 상파울루 한 기차역에 놓인 피아노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모녀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고 있다. 어머니는 딸의 피아노 레슨비를 대기 위해 4년 동안 청소일을 해왔다. 그럼에도 딸에게 피아노를 직접 사주는 건 불가능했다. 어머니는 딸의 피아노 연주를 한번 들어보는 게 소원이었고 마침내 꿈을 이뤘다. 길거리 피아노 덕분이었다. 브라질에선 이 프로젝트가 끝난 뒤 ‘예술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해마다 숱하게 버려지는 중고 피아노들이 이런 곳에서 다시 쓰일 수 있도록 돕는 움직임도 시작됐다.

제럼은 <한겨레>와의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오는 10월 아시아 지역 처음으로 중국 항저우에서 ‘길거리 피아노’가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도시마다 다른 모습으로 프로젝트가 구현될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길거리 피아노 프로젝트는 각 도시의 공공장소를 온전히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며 “어떤 곳이든 우리(길거리 피아노)를 초청하는 곳으로 달려갈 용의가 있다”고 전했다.

런던/글·사진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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