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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푸틴이 러시아고, 러시아가 푸틴이다”

등록 2012-02-10 22:27수정 2012-02-17 13:36

그래픽 이상호 기자 silver35@hani.co.kr
그래픽 이상호 기자 silver35@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푸틴은 왜 ‘한번 더’를 외치는가
▶ 푸틴의 꿈속에 스탈린의 유령이 나타났다. 푸틴이 물었다. “이 나라를 잘 통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탈린이 말했다. “우선 민주주의자들을 모조리 모아놓고 총살해버려. 그런 다음엔 크레믈 내부를 파란색으로 칠하라고.” 이어지는 푸틴의 질문. “왜 하필 파란색이죠?” 그러자 스탈린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난 자네가 첫번째 건 묻지도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고!” 블라디미르 푸틴의 집권 12년 동안 러시아에서 떠돌았던 우스갯소리다. ‘강한 러시아’란 대의를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푸틴을 꼬집은 농담이다.

푸틴이 돌아온다. 이변이 없다면 그는 올해 3월 대선을 통해 러시아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3선이다. 충실한 후임자였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발빠르게 헌법(대통령 임기 4→6년, 한차례 연임 가능)까지 고쳐, 최대 12년간 더 집권할 수 있는 발판까지 마련해놨다. ‘대통령 퇴임→총리직 수행→대통령 취임’이란 절차적 합법성을 확보했지만, 러시아 안팎의 많은 이들이 그의 3선 시도에서 불온한 ‘과거의 망령’을 본다. 최대 24년에 이르는 장기집권 시나리오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18년)를 넘어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31년)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대선의 전초전 격이었던 지난해 12월 두마(하원) 선거에서 드러난 각종 ‘부정’의 증거들은 망령의 귀환이라는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이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푸틴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도 돌아섰다. 그는 지난 7일(현지시각) 현지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푸틴이 만든 시스템이 바로 파괴의 대상이며 이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두마 선거에서 드러난 부정의 흔적들

푸틴은 아랑곳 않고 3선 가도를 독주하고 있다. 명분은 분명하다. “1990년대 말부터 (내가) 시작한 국가 발전과 강대국 건설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것이다. 대공황이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미국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줬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도 4선을 하지 않았느냐는 말도 반복적으로 꺼낸다. 두마 선거 부정 이후 들끓는 민심을 모르지 않은 듯 “(2000·2004년과는 달리) 2차 투표까지 갈 수도 있다는 걸 안다”고 짐짓 엄살도 부린다. 하지만 이내 “2차 투표는 정치 상황의 불안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엄포 아닌 엄포도 이어진다. 소련의 붕괴 이후 1990년대의 극심한 ‘불안정’을 기억하는 이들의 ‘공포’를 자극하는 것이다. 또 “그들(야권)에겐 (러시아를 이끌고 갈 만한) 분명하고 이해할 만한 목표도 없으며, 무언가 구체적인 것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비난도 쏟아냈다. 결국 요약하면 “‘강한 러시아’ 건설 목표를 안정적으로 이끌고 나갈 적임자는 나밖에 없다”는 얘기다. “내가 아니면 안 돼”라며 “한번 더”(혹은 두번 더)를 외치는 그에게서 ‘조국 근대화’란 미명 아래 18년간 한국의 민주주의를 고사시켰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그림자가 스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실제로도 푸틴은 ‘박정희식 모델’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다. 1990년,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대(옛 레닌그라드대) 총장의 국제문제 보좌관을 하던 시절, 한국의 외교관에게 “박 전 대통령에 관한 책이 있으면 한국어든 다른 언어로 쓰였든 모두 구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가스프롬 등 주요 에너지 기업과 전략산업의 국영화를 통한 경제개발 방식도 ‘박정희식 모델’을 답습한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집권 3기를 준비하는 지금, 그는 여전히 한국과 중국의 성장을 사례로 꼽으며 ‘국가 자본주의’(State Capitalism)의 이름으로 러시아 경제 발전상을 그리고 있다. 민주주의는 하되 서방의 위협으로부터 러시아 주권을 지키는 게 우선이라는 ‘주권 민주주의’ 개념에선 박정희 정권이 내세웠던 ‘한국식 민주주의’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푸틴이 박정희에게서 주목한 것은 다름 아닌 ‘위기를 타개한 강력한 리더십’이었다. 어린 시절 용맹한 스파이의 활약상을 다룬 영화 <창과 방패>를 본 뒤 ‘첩보원 한 명이 수천 명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생각에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푸틴이 아니던가. 특히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 과정에서 드러난 ‘국가의 부재’의 충격은 이런 푸틴에게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심어준 듯하다. 푸틴과 지인들의 인터뷰를 묶은 책 <푸틴의 자서전>에는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엄습했던 푸틴의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독일 군중이 국가보안위 건물을 습격하려는데도 소련군은 “모스크바(지도부)의 지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멈칫거린다. 그 순간 푸틴은 이렇게 자조한다. ‘더이상 조국은 없다.’ 그는 이를 ‘정권 마비’라는 치명적 불치병이라고 진단했다.


푸틴은 이 불치병을 치료할 방안을 ‘강력한 국가의 귀환’에서 찾고 있다.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에게서 권력을 이양받기 이틀 전인 1999년 12월29일 발표한 ‘밀레니엄 전환기의 러시아’란 글에서 이 점이 드러난다. 훗날 ‘밀레니엄 매니페스토’라 불린 이 글에서 푸틴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강한 국가는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질서의 보증인’, ‘변화의 추동자’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이 국가의 이런 역할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공포 자극하며 3선 도전
“적임자는 나밖에 없다”
박정희와 스탈린의 그림자

자유주의 운동까지 탄압
제정러시아 시절 장수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 자주 언급

“당장 상점 진열대부터 채워라”

한마디로 ‘개혁가’가 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푸틴이 생각한 개혁가의 면모는 서방 세계가 기대하는 민주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푸틴은 러시아는 자유주의적 전통을 지닌 미국이나 영국과는 다르다고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표현의 자유와 해외여행 자유화 등 서구 민주주의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고 일부 수용했지만, 이런 가치들이 러시아의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주기 위해 필수적인 가치는 아니라는 게 푸틴의 주장이다. 특히 그는 “러시아는 애초부터 매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에 기반을 둔 국가”이며 “이는 이미 러시아인들의 유전자 코드와 전통, 의식 속에 깊게 각인돼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 “군주는 선거의 당선 여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고,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머리를 굴릴 일도 없다. 따라서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국민들의 운명을 생각할 수 있다”며 군주제 전통을 옹호한다. 그런 면에서 푸틴이 그리는 개혁가의 면모는 차라리 ‘개혁군주’에 가깝다. 푸틴을 여러 차례 만났던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도 2007년 <타임>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러시아식 사고지만, 푸틴은 사회적 역량을 최대한 국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러시아를 정비한 표트르 대제나 예카테리나 여제 등의 개혁군주들과 같은 맥락에서 스스로를 개혁가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소련 몰락 직후 레닌 등 옛 혁명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떼낸 자리에 표트르 대제를 그린 판화를 내걸었던 푸틴은 3선 출마를 앞두고선 제정러시아 시절 장수 총리를 지낸 표트르 스톨리핀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격변이 아니라 위대한 러시아”라던 스톨리핀의 말처럼 점진적 개혁을 예고한 것이다. 스톨리핀이 어떤 인물인지를 짚어 보면 푸틴 3기 러시아가 보인다. 스톨리핀은 점진적 개혁을 추진한다는 명분 아래 치안력을 총동원해 혁명 운동은 물론 자유주의 운동까지 극심하게 탄압했던 인물이다. 또 국회 해산과 비입헌적 선거법 개정도 일삼았다. 하지만 건전한 자작농 육성책을 펴고 정부 내 부정부패 사범을 대거 내쫓은 까닭에 민심은 그의 편에 섰다. 민주주의도 좋지만 당장은 식료품 상점의 빈 진열대를 채우고, 바닥까지 떨어진 러시아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라는 주장을 펴는 푸틴에게 맞춤한 모델이다.

최근까지도 많은 러시아인들은 이런 푸틴에게 열광했다. 하지만 러시아 경제 성장의 견인차 노릇을 해왔던 국제 유가의 변동성이 커진데다, 고질적인 부정부패는 여전하고 빈부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부정선거의 증거들은 불붙기 시작한 의구심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이제 러시아인들은 묻고 있다. “지난 12년 동안 끝내지 못한 일을 한번 더 기회를 준다고 성공리에 끝낼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느냐”고. 해답은 아직 모른다. 분명한 건, 푸틴이 치켜세운 루스벨트와 스톨리핀 모두 자신들이 세운 과업이 완수되는 걸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는 점이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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