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력·언론 등에 업고 뇌물
돈과 언론, 권력을 한손에 쥐고 17년간 이탈리아 국정을 농단해온 실비오 베를루스코니(75) 이탈리아 총리가 8일(현지시각) 사퇴를 선언하며 결국 ‘백기’를 들었다. 미성년자 성매매와 섹스파티 등 잦은 성추문과 뇌물공여·탈세 등 온갖 부정부패 혐의 속에서도 번번이 회생해왔던 그를 무릎 꿇린 것은 ‘경제난’이었다고 <에이피>(AP) 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2008년 3번째 총리 취임 이후 50번이 넘는 의회의 불신임 시도를 피하며 ‘테플론 총리’(테플론 코팅 처리된 프라이팬처럼 위기국면을 잘 빠져나간다는 뜻)란 별명까지 얻은 그였지만, 잇따른 국가신용등급 강등과 국채수익률 급등, 경제성장 둔화 등 국가부도의 경고음 앞에서 그의 지도력은 무기력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리더십을 평가할 잣대로 여겨졌던 이날 하원의 2010년 재정지출 승인안 표결에선 정권 유지에 필요한 과반수(316석)에 못 미치는 308표의 찬성표가 나왔다. 그가 메모지에 적었던 ‘시나리오’대로 ‘8명의 배신자’가 나온 것이다. 의회 전광판에 308개만 불이 들어온 걸 보고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그리고 몇 시간 뒤 “경제개혁 관련 법안들의 의회 승인이 이뤄지면 사임하겠다”며 “조기총선이 치러진다면 불출마하겠다”고 밝혔다. 무수한 문제 속에서도 계속될 것 같았던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집권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1994년 ‘전진 이탈리아’라는 정당을 창당하며 정치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청소기 외판원과 유람선 오락프로그램 사회자 등을 거쳐 건설업으로 돈을 벌고 언론제국(메디아세트)을 이룬 그는 이탈리아판 ‘성공 신화’로 각광을 받았고, 같은 해 치러진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총리가 됐다. 몇 달 뒤 북부연맹이 연정에서 탈퇴함에 따라 사임해야 했지만, 2001년 5월 치러진 총선에서 총리직 복귀에 성공했고, 2006년 총선에서 중도좌파 연합의 로마노 프로디에게 정권을 넘겨줬다가 2년 뒤 통합 보수정당인 자유국민당(PDL)을 결성, 다수당 대표가 돼 3번째 총리직을 맡았다.
하지만 그의 재임 기간은 온통 ‘얼룩’투성이였다. 그는 뇌물공여, 탈세, 성매매 등 온갖 혐의로 20년(2009년 기준) 동안 2500번 법정에 출두했다. 재판 비용으로 들어간 돈만도 2억유로에 이른다. 지금도 뇌물공여·권력남용·미성년자 성매매 등 3건의 형사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혐의가 불거질 때마다 그는 부인으로 일관했다. 자신을 비판하는 반대파엔 “상종 못할 공산주의자”란 낙인을 찍고 수사 검찰에는 “테러리스트”란 막말을 퍼부어댔다.
잦은 성추문은 ‘남성스러움’으로 포장하기 일쑤였다. 20년을 함께 산 아내가 2009년 그의 난잡한 생활을 더는 못 참겠다며 이혼을 선언했을 때도 “내가 성인은 아니잖으냐”고 했던 그였다.
문제적 인물인 그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의 최장 집권 총리로 군림할 수 있었던 배경엔 막강한 재력과 언론이 있다. 이탈리아 3위 재력가(78억달러)인 그는 자신이 보유한 <채널 5> 등 3개 민영방송과 최대 판매부수를 가진 잡지 <파노라마>, 일간지 <일 조르날레> 등을 통해 이탈리아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위기를 모면해왔다. 하지만 격화되는 경제위기로 시장의 사임 압력이 높아졌고, 그는 결국 자신이 그렇게 신봉했던 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 때문에 정치인생을 끝내게 됐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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