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미사일방어체제 동유럽 확대 논란
“유럽을 분열시키고 새로운 냉전 야기” 경고
일방적 확대 불만…“나토서 공개논의” 목소리
일방적 확대 불만…“나토서 공개논의” 목소리
동유럽 미사일방어(엠디) 구축을 둘러싼 논란이 미국과 유럽의 묵은 갈등을 재점화하고 있다. 미국의 동유럽 엠디 추진에 대해 러시아가 극도로 반발해온 데 이어, 유럽 지도자들도 대미 비난 대열에 뛰어들었다.
포문은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열었다. 시라크 대통령은 9일 유럽연합(EU) 정상회의 폐막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폴란드·체코 엠디 구축 계획에 대해 “유럽과 미국은 러시아의 우려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이 계획은) 유럽을 분열시키고 새로운 냉전을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우리는 유럽을 새롭게 분할하는 선을 만들어내거나 낡은 질서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며 사실상 미국의 엠디 계획 포기를 촉구했다. 현재 미국은 폴란드에 요격미사일 10기를 배치하고, 체코에 레이더기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한층 강도높은 비난을 퍼부었다. 슈뢰더 전 총리는 11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한 연설에서 미국의 계획은 “정치적으로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라며 “러시아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유럽에 도움이 되지 않는 어리석은 포위정책으로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지금은 유럽연합이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해야 할 시점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엠디 문제가 러시아를 서방에서 밀어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도 지난 8일 독일 시사주간 <디차이트> 기고문을 통해 핵무기 비확산체제를 해칠 수 있다며 미국의 방침을 비판했다.
이른바 ‘옛 유럽’의 양대 축인 프랑스와 독일 전·현직 정상들의 잇따른 비판에는 미국의 ‘일방주의적’ 엠디 확대에 대한 강한 불만이 깔려 있다. 유럽연합의 동유럽 확산으로 그 어느 때보다 유럽 내부 통합과 대러시아 협력이 긴요한 시점에서 미국이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나라가 논란에 뛰어들면서 미국과 러시아의 공방으로 진행돼온 마찰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자칫 2003년 이라크 침공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미-유럽의 날카로운 대립이 재연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온다.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엠디 배치 대상국과, 다른 유럽 나라들 사이의 반목도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룩셈부르크가 “러시아를 구석으로 몰면 유럽의 안정은 기대하기 어렵다”며 우려를 나타내자 체코 정부는 “다른 나라가 끼어들 사안이 아니다”며 곧바로 반박했다. 또 야프 데 후프 스헤페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사무총장은 11일 <파이낸셜타임스> 회견에서 “나토 안에 A리그와 B리그가 있어선 안된다”며 엠디 구축에 따른 안보혜택의 격차로 유럽 나라들 사이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논란이 확산되면서 러시아를 포함해 전체 유럽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토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최근 “나토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라고 말했다.
박중언 기자 park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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