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뮌헨에서 백장미 활동 시절의 트라우테 라프렌츠. 사진 위키피디아 커먼스 제공
한스 숄·소피 숄 남매 등 6명 주축
1942~43년 뮌헨대에서 ‘비판’ 전단
단두대 처형·‘자유’ 외침 등 소설·영화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유명
고인 “한스 숄과 연인 사이” 등 증언
“자유여, 영원하라!”, “태양은 아직도 빛난다.”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한국 ‘운동권’ 대학생들 사이에 필독서로 꼽혔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원제 백장미)의 실존 인물 ‘한스 숄, 소피 숄’ 남매가 사형 직전 남긴 말이다. 이들과 함께 1940년대 나치독일에 저항한 운동단체 ‘백장미’ 활동을 했던 마지막 생존자 트라우테 라프렌츠가 숨졌다. 향년 103.
라프렌츠가 6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톤 근교의 메겟에 있는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뉴욕 타임스>가 그의 아들 마이클 페이지를 인용해 11일 보도했다.
1943년 나치에 의해 처형당한 백장미 단원 6명. 윗줄 왼쪽부터 한스 숄, 소피 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아랫줄 왼쪽부터 알렉산더 슈모렐, 빌리 그라프, 쿠르트 후버 교수. 도서출판 평단 제공
백장미 운동은 1940년초 나치체제의 잔혹상과 유대인 학살 등을 독일 사회에 고발하며 저항을 촉발한 단체다. 뮌헨대 학생이던 한스 숄과 소피 숄, 알렉산더 슈모렐, 빌리 그라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그리고 쿠르트 후버 철학교수 등 6명이 주축이다. 1942년 여름 의대생 한스 숄과 알렉산더 슈모렐이 ‘바이쎄 로제 인 뮌헨’(화이트 로즈 인 뮌헨)이라는 이름으로 첫번째 리플렛을 발행하면서 ‘백장미’로 불렸다. 이들은 폴란드에서 벌어진, 유태인 학살에 대해 ‘인간 존엄에 반하는 테러’라 규정하고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보지 않고 듣지 않습니다. 맹목적으로 거짓말쟁이들을 따라 폐허를 향할 뿐입니다”라며 동참을 호소했다. ‘프리덤’ 단어를 공공 건물에 쓰는 등 비밀 활동을 이어가던 이들은 1943년 2월 ‘살인자 정부에 저항할 것’을 독려하는 후버 교수의 전단지를 뮌헨대에서 뿌렸다. 하지만 경비원 야코프 슈미트의 밀고로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에 체포되면서 백장미의 전단은 여섯번째에서 막을 내렸다. 숄 남매와 프롭스트 등 3명은 체포된 지 나흘 만인 2월22일 단두대에서 전격 처형됐다. 그해 7월 후버 교수 등 3명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무렵 히틀러가 단두대 처형을 부활시킨 까닭에 5천명가량이 참수형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9년 5월생인 라프렌츠는 함부르크 의대 시절 슈모렐을 통해 숄 남매를 알게 되어 뭔헨으로 옮긴 뒤 백장미 운동에 동참해 전단을 나르거나 잉크와 종이, 봉투 등을 마련하는 지원활동을 했다. 이 때문에 한스 남매 처형 이튿날 그 역시 체포되어 1년간 복역을 했다. 석방된 뒤에도 곧 다시 체포되는 등 그는 1945년 4월 독일이 패전할 때까지 경찰 조사를 받거나 감옥을 들락거려야 했다. 라프렌츠는 2018년 8월 타블로이드 신문 <빌트 차이퉁>과 인터뷰에서 “사형 선고를 받을 위기에 있었다”면서 재판 시작을 며칠 앞두고 미국 군대가 교도소를 점령하고 풀어줘 목숨을 건졌다고 증언했다. 또한 노르웨이 작가 겸 기자 페터 노르만 와게가 2018년 써낸 책 <자유여 영원하라>(Long Live Freedom!)을 보면, 고인은 “1941년 한스와 연인 사이가 됐고, 자신이 백장미그룹이란 이름을 짓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독일 뮌헨대 건물 앞 거리에 있는 백장미 추모판.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백장미의 활동 기간은 1년도 채 안됐지만, 나치의 선전·선동과 독재정치, 2차대전 초기 독일군의 잇따른 승전보에 속아 비판의식을 잃은 독일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고 독일 자유주의 정신의 상징으로 남았다. 특히 뮌헨대에는 전단지를 비롯, 발각되고 재판받고 처형되기까지 백장미 운동의 기록과 전 세계 여러나라에서 출간된 관련 서적 등을 전시해놓은 기념홀을 비롯해 숄 남매와 후버 교수 등의 이름을 딴 장소가 곳곳에 남아 있고 뮌헨 시내에도 다양한 기념 표식이 있다.
특히 뮌헨 남부 그래펠핑의 쿠르트 후버 거리에는 2019년 3·1운동 100돌을 맞아 <압록강은 흐른다>로 유명한 이미륵((1899~1950·본명 이의경) 작가의 기념 동판이 나란히 새겨져 새삼 두 사람의 인연이 조명받았다. 후버 교수는 1928년 뮌헨대에서 이미륵이 ‘한국 동물학 박사 1호’로 논문을 쓸 때부터 도움을 주었고, 이미륵은 후버 교수의 처형 이후 나치의 감시와 연좌제로 고립된 유족들에게 전시 배급품을 나눠주며 끝까지 돌봐주었기 때문이다.
백장미 이야기는 영화 <백장미>(1982)와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2005)로도 나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2019년 5월 100살 생일 때 독일 정부로부터 공로 훈장을 받은 라프렌츠. 독일 외무부 제공
고인은 1947년 미국으로 이주해 의학 공부를 마쳤고 안과의사인 버넌 페이지와 결혼해 네명의 자녀를 뒀다. 20여년 에스페란자 장애인학교의 교장을 맡았고 인지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 1995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목장으로 이주해 말년까지 살았다.
그는 2019년 5월 100살 생일을 맞아 독일 정부로부터 공로 훈장을 받았다. 그때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라프렌츠를 “국가사회주의의 범죄에 맞서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독재와 유대인 학살에 저항하는 용기를 지닌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라며 “자유와 인류애의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한스의 누나이자 소피의 언니인 맏이 잉게 숄이 쓴 소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2021년 한국어판 표지. 도서출판 평단 제공
1980년 중반 숄 남매의 맏이인 잉게 숄의 회고록 <백장미>를 교재로 문학 수업 강독을 지도했다는 문학평론가 염무웅 영남대 명예교수는 1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조사를 남겼다. “백장미 운동 40여 년이 될 무렵 그들의 삶과 저항정신을 주제로 토론했는데, 그로부터 다시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이제 딴 세상처럼 변한 사막 같은 풍경 속에서 마지막 생존자의 부고를 듣는다. 돌아보면 그들은 참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불의와 폭력에 대한 저항은 언제 어디서나 옳다.”
박병수, 김경애 선임기자
su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