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제59차 뮌헨안보회의(MSC) 주요국 외교장관 회의에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교장관(왼쪽 넷째) 등이 참석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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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19일(현지시각) 독일 뮌헨에서 열린 59차 뮌헨안보회의 취재 현장. 세계 각국 정상부터 외교·국방 장관, 주요 국제기구 수장 등 500여명이 참석하는 유럽 최대 규모 회의다. 지난해 2월24일 터진 우크라이나 전쟁 1년을 앞두고 열린 회의였던 만큼 주요 관심사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에 모아졌다. 우크라이나의 드미트로 쿨레바 외교장관은 이곳에서 “불가능은 없다. 우린 이길 것”이라며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고, 우크라이나를 돕는 데 적극적인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러시아군을 약화시킨다면 이것이 곧 우리의 안보를 강화하는 것”이라며 어깨를 겯었다. 안보회의 현장에서 직접 느낀 뜨거운 분위기와 눈길을 끌었던 취재 뒷얘기를 소개한다.
‘뼈 때린’ 우크라 장관과 ‘찐친’ 영국 총리
올해 뮌헨회의에서 가장 눈길을 끈 이는 단연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교장관이다. 안보회의에서 주요 인사들은 공식·비공식 양자 협의를 진행하는데, 쿨레바 장관은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부터 중국 외교사령탑인 왕이 중앙정치국 위원까지 두루 만났다. 주요 7개국 외교장관 회의에도 초대받았다. 쿨레바 장관은 18일 전세계 기자들을 모아놓고 기자회견도 했다.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을 ‘우크라이나의 승리’에 대한 궁금증과 회의적인 반응에 그는 강력한 메시지로 답했다.
기자가 물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내년 뮌헨안보회의가 열릴 때는 ‘전쟁이 끝난 뒤’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보다 더 많은 병력을 전쟁에 투입할 수 있을 텐데, 전쟁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쿨레바 장관은 단호했다. “1년 전 뮌헨에서 사람들은 우리가 24시간, 48시간 이상 버티지 못할 거라고 했다. 지난 한 해 우리는 수없이 증명했고, 역사에서 작은 나라가 큰 군대를 이긴 사례는 많다. 우린 이길 거다. 우리와 함께해달라. 불가능이란 없다.”
24일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을 맞았다. 전선에서 교착 상태가 이어지는 듯하다. 일부 전문가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한국전쟁처럼 ‘38선’을 그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여기에도 쿨레바 장관은 일침을 가했다. “누군가 자기 아파트에 침범해 침실에 영원히 머물겠다고 하면 ‘그 전문가’는 타협안에 동의할까? ‘남의 땅’을 거래하는 일은 언제나 쉽다. 난 그 전문가에게 ‘아니요’라고 말하고 싶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이번 안보회의에서 영국이 우크라이나의 ‘진짜 친구’임을 또 한번 인증했다. 18일 토론에서 우크라이나 인사들은 수낵 총리에게 질문 세례를 했다. 군 장교와 의회 관계자는 질문을 하기 앞서 “전쟁 첫날 영국이 제공한 무기로 내 목숨을 구했고, 내 동료들이 살았다”, “정말 고맙다”며 감사를 전했다.
영국은 우방국 가운데 처음으로 우크라이나에 주력 전차 지원을 결정하며 미국, 독일의 추가 행동을 이끌었다. 키이우가 전투기 지원을 간곡히 바라는 상황에서 지난 8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깜짝 런던 방문 때, 영국은 조종사 훈련이 사실상 전투기 지원의 첫 단계임을 확인했다. 수낵 총리는 이날 회의에서도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위해 장거리 무기를 제공하는 첫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수낵 총리의 발언은 다른 리더들과 좀 달라 돋보였다. “(올해 7월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열리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서, 향후 러시아 침략에서 우크라이나를 보호하기 위한 ‘새 안전보장 대책’이 담긴 헌장을 제정할 거다.”
사회자가 “러시아가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나토와 싸운다’고 말할 수도 있다. 걱정되지 않냐”고 묻자, 수낵 총리는 “전쟁 전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전보장 구조가 실패했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반박했다. 과거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포기 대가로 영토와 독립을 보장하는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2014년 돈바스 전쟁을 멈추며 체결한 민스크 협정 등을 러시아가 모두 위반했기에 현재 안전보장 체계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까다로운 질문에도 거침없는 답을 내놨다. ‘다른 나라가 영국 수준의 무기 지원 속도를 따라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묻는 말엔 “무얼 위해 무기를 비축하는지 자문해보자”며 “무기 비축량이 고갈돼도 러시아군을 약화시킨다면 이는 곧 우리의 안보를 강화하는 것이다.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점령 아래 있는) 크림반도를 타격할 장거리 미사일을 승인하는 것이냐’는 질문에도 이렇게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영토와 주권을 침해당했고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다.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가 있고, 그것(우크라이나 방어)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번 안보회의의 또 다른 이야깃거리는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였다.
“왜 한 인간으로서 춤을 춘 것에 대해 사과했어야 할까요? 세상에, 너무 끔찍해요.” 18일 ‘지정학적 유럽의 탄생’ 토론 사회를 맡은 미국 <시엔엔>(CNN) 앵커 크리스티안 아만푸어가 패널로 나온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에게 물었다. 지난해 8월 그가 파티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모습이 소셜미디어로 유출된 뒤 ‘품위 유지’ 논란이 일고, 마약 검사를 받아 언론에 ‘음성’임을 확인시켜야 했던 상황에 대해 물었다. 사회자는 핀란드의 나토 가입 등 외교·안보 이슈를 한창 논하다 토론이 끝날 무렵 ‘여성 정치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물었다.
“일단 그 (논란) 이후에 또 춤을 췄고요.” 마린 총리의 답변에 좌중은 ‘빵’ 터졌다. 30대 후반 젊은 총리는 당당했다. 마린 총리는 “전세계 50%가 여성이다. 오늘날 의사결정도 여성이 50%를 해야 한다”며 “하지만 정치 시스템에는 여성이 직책을 맡는 걸 방해하는 구조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남성인) 전 핀란드 국방장관이 (지난해 12월) 육아휴직을 한 것이 자랑스럽다. 핀란드의 평등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좌중은 마린 총리에게 여러차례 박수를 보냈다. 그는 이번 회의의 핵심 주제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침공과 관련해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 때 우리는 더 강력하게 대응하지 않은 큰 실수를 했다”며 “그때 제대로 대응했다면 이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더는 순진하면 안 된다”고 했다. 러시아와 1340㎞의 긴 국경을 접한 핀란드의 마린 총리는 지난해 러시아의 침공이 있은 지 석달 만에 나토에 가입 신청서를 냈다.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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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 특파원으로 현지에서 발로 뛰며 취재하고 있다. 유럽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한 뼘 더 깊이 전하고자 한다. 4주 간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