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17일 코소보 북부 미트로비차에서 세르비아계 시위대가 코소보평화유지군에 돌을 던지며 코소보의 독립 선언에 항의하는 모습. 미트로비차/AP 연합
신분증과 번호판을 둘러싼 세르비아와 코소보 사이 갈등이 한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이 문제는 코소보를 둘러싼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 간의 해묵은 민족 대립을 넘어, 미국과 러시아 간의 대리전의 성격도 띠고 있어 향후 사태 전개에 이목이 끌린다.
8월 한달 내내 계속됐던 세르비아-코소보 당국 간 협의를 중재한 주제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 정책 고위대표는 27일(현지시각) 트위터에 “우리가 합의를 해냈다. 유럽연합이 주도한 대화로 세르비아는 코소보 신분증 소지자에 대한 출입국 서류를 폐지하고, 코소보는 세르비아 신분증 소지자에게 출입국 서류를 도입하지 않기로 했다”고 적었다. 이 합의를 통해 “코소보에 사는 세르비아계 주민과 다른 모든 주민이 각자 신분증으로 두 나라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됐다. 비오사 오스마니 코소보 대통령도 페이스북에 “호혜와 평등, 이동의 자유는 민주적 사회와 유럽이 추구하는 가치의 기초”라며 코소보가 지속 추진해온 “상호 인정”을 위해 애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갈등이 완전 해소된 것은 아니다. 핵심 쟁점인 ‘자동차 번호판’ 문제가 남았기 때문이다. 알바니아계가 주축이 된 코소보 정부는 7월 말 자국에 사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에게 8월1일부터 그동안 사용하던 세르비아 정부의 번호판 대신 코소보 정부의 번호판을 달 것을 요구했다. 코소보에 사는 5만명에 이르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크게 반발했다. 번호판 문제를 민감한 역사와 주권의 문제로 받아들인 것이다.
분노한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코소보 북부 지역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도로를 점거하거나 공중에 총을 발사하는 등 소요 사태를 일으켰다. 세르비아 정부 역시 ‘코소보가 세르비아계 소수 민족을 억압한다’며 힘을 보탰다. 갈등이 본격화되자 코소보 정부는 부랴부랴 이 조처 시행을 한달간 미뤘다.
번호판 분쟁이 민감한 대립으로 번진 이유를 이해하려면, 이 지역을 둘러싼 복잡한 역사로 눈을 돌려야 한다. 코소보는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중심지였지만, 현재는 알바니아계가 90% 넘게 거주하고 있다. 세르비아인들은 코소보를 빼앗긴 ‘민족의 발원지’이자 회복해야 할 영토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때문에 1990년대 초 유고연방이 해체된 뒤 세르비아 정부는 1998~1999년 분리독립을 시도하는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분리주의 세력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이 코소보 분쟁으로 인해 1만3천여명이 숨졌다.
분쟁이 격화되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물리적 개입에 나섰다. 세르비아는 결국 1999년 코소보에서 철수했다. 이후 코소보는 2008년 2월 유엔·미국·서유럽 등의 승인 아래 독립을 선포했지만, 세르비아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세르비아의 우방국인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코소보 독립이 이뤄진 그해 8월 조지아를 침공하며 반발했다. 반면, 유럽연합은 코소보 독립 이후 양국 간 관계 정상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나토 역시 수시로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코소보 북부에 4천여명의 평화유지군을 배치해 두고 있다.
유럽연합은 18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과 알빈 쿠르티 코소보 총리 간 회담을 주선했지만 최종 해결엔 이르지 못했다. 세르비아 당국은 ‘코소보 북부의 세르비아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나설 수 있다’며 무력 개입 가능성까지 시사하는 중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러시아가 편드는 세르비아와 미국이 지지하는 코소보의 대립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외 갈등’과 같은 의미도 있어 이후 어떻게 전개될지에 관심이 끌린다”고 밝혔다.
노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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