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국왕 필리프(오른쪽 네번째)와 콩고민주공화국 펠릭스 치세키디 대통령(오른쪽 세번째)가 8일 킨샤샤 대통령궁 뜰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치세키디 대통령의 부인 데니스 니아케루 치세키디(왼쪽에서 네번째)와 필리프 국왕의 부인 마틸드 왕비(오른쪽에서 두번째), 알렉산더르 더크로 벨기에 총리(맨 오른쪽)이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킨샤사/AFP 연합뉴스
벨기에 국왕이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을 방문해 식민지배 76년간 벌어졌던 약탈과 인종차별, 폭력에 대해 “가장 깊은 유감”을 표했다. 그러나 공식 사과는 끝내 하지 않았다.
콩고민주공화국을 방문 중인 필리프 국왕은 8일 수도 킨샤사에서 열린 의회 합동회의에서 “많은 벨기에 사람들이 콩고와 콩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헌신했더라도 식민지배 그 자체가 잘못된 약탈과 지배 위에 세워진 것”이라며 “식민지배는 불평등한 관계였고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없고 가부장제와 차별, 인종주의의 하나”라고 말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필리프 국왕은 이어 “식민지배는 폭력과 굴종으로 이어졌다”며 “바로 여기 콩고에 처음 와서 콩고 사람들 앞에서, 오늘날까지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 앞에서 나는 과거의 이들 상처에 대해 나의 가장 깊은 유감을 다시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3년 즉위한 필리프 국왕은 2020년 6월 콩고민주공화국 독립 60돌을 맞아 식민지배에 대해 “가장 깊은 유감”을 표하는 편지를 펠릭스 치세케디 콩고민주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냈다. 벨기에 국왕이 한 첫 유감 표명이었다. 이때문에 필리프 국왕이 이번 방문 때 공식 사과를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콩고 정치권은 대체로 이번 필리프 국왕의 방문을 환영했다. 많은 콩고 여당 지지자들이 벨기에 국기를 흔들며 필리프 국왕을 맞았고, 의회에는 “공통의 역사”라고 적힌 현수막이 내걸렸다. 필리프 국왕이 공식 사과를 하지 않은 점을 비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벨기에의 콩고민주공화국 식민지배는 식민주의가 한창이던 당시 유럽에서도 큰 비판을 받을 만큼 잔혹했다. 벨기에 왕국의 2대 국왕인 레오폴드 2세는 1885년부터 1908년까지 현재 콩고민주공화국에 해당하는 지역을 사유지로 삼아 지배했다. 레오폴드 2세는 겉으로는 ‘콩고 독립국’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으나 실상은 이름과는 정반대였다. 레오폴드 2세가 파견한 이들은 주민들을 고무농장으로 내몰았고, 수확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성인은 물론 아동의 손발을 잘랐다. 밀림의 나무는 대량으로 벌채되고 값비싼 광물과 코끼리 상아는 약탈당했다. 레오폴드 2세가 사유지로 지배하던 시기만 수십만명이 기아와 폭력 등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레오폴드 2세의 악행은 1900년대 초에 유럽에서 폭로됐고, 국제적 비난 여론에 직면한 벨기에 정부는 국왕에게 소유권을 넘겨받아 ‘벨기에령 콩고’로 직접 식민지배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야당 상원의원 프랑신 무윰바 은칸가는 트위터에 “벨기에 국왕의 연설에 경의를 표한다. 그렇지만 벨기에가 저지른 잔혹한 범죄 앞에서 유감은 충분하지 않다”고 썼다. 그는 “우리는 벨기에 국왕의 사과와 배상 약속을 기대한다”며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페이지를 분명히 넘기는 비용”이라고 말했다. 벨기에에서 활동하는 콩고 연구자인 나디아 은사이는 “벨기에에서는 공식 사과를 하면 콩고가 이를 금전적 배상 요구에 이용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다”고 말했다.
7일부터 시작된 필리프 국왕의 콩고민주공화국 방문길에 부인 마틸드 왕비와 총리 알렉산더르 더크로가 동행했다. 치세케디 대통령은 더크로 총리와의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과거에 머물지 않으며 미래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식민지 지배 역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별로 없었던 벨기에에서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재조명된 계기는 2020년 미국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사건 때문이었다. 세계적 인종차별 반대 운동 분위기 속에서 벨기에에서도 식민지배 역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벨기에 의회는 과거 식민지배의 역사 기록을 재검토하는 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이 위원회는 올해 최종 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필리프 국왕은 이번 방문 때 콩고 원주민 중 하나인 수쿠족의 전통 가면을 콩고민주공화국 국립박물관에 “무기 임대” 형식으로 되돌려줬다. 이 가면은 벨기에의 왕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것이다.
벨기에 정부는 아프리카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파트리스 루뭄바 콩고 초대 총리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아를 오는 20일 유족에게 돌려줄 예정이다. 루뭄바는 1961년 1월 콩고 내 분리주의자들과 벨기에 용병에게 살해됐다. 콩고에서 경찰로 일했던 벨기에인이 1990년대에 루뭄바의 주검을 산성 물질로 녹이는 일에 가담했고 기념품으로 치아를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 벨기에 정부가 넘겨주는 치아는 이 인물이 갖고 있던 것으로 유전자(DNA) 검사를 통해 루뭄바의 유해가 맞는지 확인한 것은 아니다.
필리프 국왕은 2019년 3월 한국을 방문해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등 한국과도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박병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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