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관리들이 잇따라 핵전쟁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국가방위통제센터를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 셋째). 모스크바/로이터 연합뉴스
러시아 고위 외교 당국자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선제적 핵공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채 “핵무기 사용 조건은 군 교범에 명백하게 나와 있다”며 핵위협을 이어갔다. 미국 국가정보국(DNI)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패하는 것을 ‘실존적 위협’으로 받아들이면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알렉산드르 그루시코 러시아 외교차관은 10일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선제적 핵공격을 배제할 것이냐는 질문에 “우리는 군사교리를 갖고 있다. 여기에 모든 것이 명백하게 적혀 있다”고 답했다고 국영 <리아 노보스티> 통신이 보도했다. 그가 언급한 군사교리란 푸틴 대통령이 2020년 6월 서명한 ‘러시아연방의 핵억제 정책에 관한 기본 원칙’이란 제목의 대통령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면, 러시아는 핵무기를 “전적인 억제 수단”으로 규정하며 △러시아 영토 또는 동맹국에 핵무기나 대량 살상 무기 공격을 할 경우 △러시아나 동맹국을 공격하는 탄도미사일이 발사됐다는 믿을 만한 정보를 입수한 경우 △러시아의 핵심 정부·군사 시설이 공격을 당해 핵전력 대응 행동이 약화될 경우 △러시아가 재래식 무기로 공격을 당해 존립을 위협받는 경우 등 4가지 사용 조건을 열거하고 있다. 핵이 아닌 재래식 공격을 당하더라도 ‘존립을 위협’받는다면 핵을 사용할 수 있다고 언급한 점이 눈에 띈다.
미국 주간 <뉴스위크>는 이 4가지 조건은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적대 행위를 비난하면서 발언한 것과 아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푸틴 대통령은 2월24일 우크라이나 침공 개시와 관련된 대국민 연설에서 “무책임한 서방 정치인들이 여러 해 동안 꾸준히 무례하고 인정사정없이 조장한 근본적인 위협”에 대해 거론한 바 있다고 매체는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뒤 푸틴 대통령 등 러시아 당국자들은 “핵전쟁 위험은 실재하며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상당한 위험이 있어 과소평가할 수 없다”(라브로프 외교장관)는 발언을 이어왔다. 또, 개전 직후엔 핵억지력 부대에 ‘특수경계태세 돌입’을 지시했고, 지난 4일엔 유럽에 가까운 칼리닌그라드에서 핵 탑재가 가능한 이스칸데르 미사일 모의 발사훈련을 실시했다. 2차 세계대전 전승절(9일) 기념 공군 퍼레이드의 예행연습이 이뤄진 7일엔 핵전쟁 때 사용되는 공중 지휘통제기 일류신 IL-80을 등장시켰다. 말뿐 아닌 행동으로도 위협 수위를 높여온 것이다. 흔히 ‘심판의 날’ 항공기로 불리는 이 지휘통제기는 당일 공군 퍼레이드가 취소되면서 공식 등장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거듭된 위협에 미국은 깊은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미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애브릴 헤인스 국가정보국장은 10일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전쟁에서 지고 있다고 인식하는 경우” 푸틴 대통령이 ‘실존적 위협’에 처했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개전 직후 시도했다 포기한 키이우 포위전은 물론 현재 진행 중인 돈바스 공방전에서도 원하는 만큼 신속한 전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헤인스 국장은 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전쟁에 개입하거나 개입하려고 할 경우”에도 푸틴 대통령은 패전을 예상하고 이를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그동안 핵무기 사용을 검토할 수 있는 상황으로 ‘실존적 위협’을 거듭 거론해왔다.
헤인스 국장은 푸틴 대통령이 핵무기에 손을 대기 전에 상황을 격화시키는 많은 행동을 하고, 지금까지와 다른 신호를 보낼 것으로 예상했다. 구체적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중폭격기, 전략잠수함의 분산을 수반하는 대규모 핵무기 사용 훈련이 이런 ‘신호’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윌리엄 번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도 앞선 7일 러시아가 전술핵을 사용할 위험을 서방이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신기섭 선임기자,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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