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관 모형과 러시아 루블화가 함께 놓여 있는 사진. 러시아는 유럽연합(EU) 국가들에 자국 은행을 통해 천연가스 구매 대금을 루블로 결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카드리 심슨 유럽연합(EU) 에너지 정책 담당 집행위원이 러시아가 제시한 천연가스 구매 대금을 루블화로 결제하는 방식을 회원국이 수용하면 “제재 위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회원국들은 “더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며 반발했다.
심슨 집행위원은 2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 에너지 담당 장관 회의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러시아가 제시한 (대금 지급) 과정 전부를 따르는 것은 제재 위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3월31일 자국이 지정한 이른바 ‘비우호국’들은 천연가스 구매 대금을 러시아 통화인 루블로 내야 한다는 대통령령을 내렸다.
다만, 러시아는 수입국이 직접 루블로 대금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간접 방식’을 제안했다. 먼저, 유럽의 가스 수입업체가 유럽연합의 제재 대상에 빠져 있는 러시아 은행 ‘가스프롬방크’에 두 개의 계좌를 연다. 첫째 계좌에 유로나 달러를 입금하면 가스프롬방크가 루블로 환전해 수입업체가 보유한 두번째 루블 계좌에 입금한다. 이 루블 계좌에서 러시아 가스 기업 가스프롬에 대금이 송금되는 방식이다. 폴란드와 불가리아는 이 같은 러시아의 요구를 거부했다가 지난달 27일 천연가스 공급이 끊겼고,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수용 여부를 고민 중이다. 이런 민감한 상황에서 심슨 집행위원이 러시아의 요구를 전면 수용하면 ‘제재 위반이 된다’고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제재 위반인지 여전히 모호한 측면이 있다. 유럽연합이 지난달 21일 발표한 지침에 따르면 회원국 기업이 가스프롬방크에 계좌를 여는 것 자체는 제재 위반이 아니다. 지난달 28일 열린 브리핑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유럽연합 고위 당국자는 가스 대금을 유로로 지급한 단계에서 대금 지급을 끝냈다고 선언하면, 제재 위반이 아니라고 말했었다. 이에 견줘, 러시아는 루블로 환전까지 끝나야 대금 지급 의무가 완료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환전 과정에는 유럽연합의 제재 대상인 러시아 중앙은행이 개입한다.
유럽연합은 지난해 기준 역내 천연가스 소비량의 40%가량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엄격한 기준을 제시할 수록 대러 의존도가 높은 회원국들이 곤경에 놓이는 구조다. 유럽연합은 지난 2월 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러시아산 석탄의 수입을 금지하고, 석유 금수 조처도 논의 중이지만, 천연가스는 손대지 못하고 있다.
2일 브뤼셀 회의 뒤에도 안나 모스크와 폴란드 환경장관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루블 결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확인했다. 이를(러시아의 요구를) 따르는 것은 제재와 유럽연합 연대 위반”이라고 말했다. 반면, 체코의 산업·무역 장관은 유럽연합에 “명확한 설명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에너지·기후 장관도 독일은 유럽연합 정책을 따를 것이지만 가스프롬방크에 계좌를 개설하라는 러시아의 요구가 “푸틴의 체면을 살려주는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조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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