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7일 화상을 통해 독일 연방의회에 연설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미국 등 서구 나라들이 서베를린을 돕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나섰던 ’베를린 공수’를 언급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독일의 더 많은 지원을 호소했다. AFP 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각) 독일 연방의회 연설에서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에게 우크라이나와 유럽 사이에 세워진 ‘새 장벽’을 허물어 달라고 호소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화상으로 이뤄진 독일 연방의회 연설에서 현재 유럽은 “장벽에 의해 나뉘어져 있다. 이는 베를린 장벽이 아니다. 이 장벽은 유럽 한가운데서 자유와 속박 사이에 세워진 장벽이다. 이 장벽은 우크라이나에 폭탄이 떨어질 때마다 커지고,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한 평화를 위한 결정들이 내려지지 못할 때마다 늘어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냉전 초기 고립된 베를린을 돕기 위해 미국 등이 추진한 ‘베를린 공수’를 언급하면서 “당시 하늘은 안전했지만, 현재 우리는 러시아의 폭탄과 미사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안전한 공중 가교(airbridge)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면서 숄츠 총리에게 우크라이나와 서유럽 사이에 세워진 “새 장벽을 허물어 달라”고 요구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언급한 베를린 공수란 소련이 동독 땅에 둘러싸인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육로를 봉쇄하자 미국 등 서구 나라들이 1948~1949년 약 27만회에 걸친 공수 작전을 펼쳐 물자를 공급한 일을 말한다. 이를 계기로 미국과 서유럽의 집단안보 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발족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또 독일이 지난 역사적 과오인 홀로코스트를 반성할 때마다 되풀이 말해 온 “다시는 허용하지 않겠다”(never again)는 말을 꺼내 들어 “매년 정치인들이 ‘다시는 허용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이 말은 의미가 없다. 지금도 유럽에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인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되살려 우크라이나에 대한 더 많은 지원을 요구한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그동안 미국·영국·캐나다 등 주요국 의회에서 화상 연설을 할 때도 그 나라 사람들이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끌어내 지원을 호소해왔다. 전날인 16일 미 의회에선 “악의 세력이 당신의 도시를 전장으로 바꾸려 했던 9·11, 무고한 시민이 하늘로부터 공격받던 때를 기억해 달라”고 말했고, 8일 영국 의회 연설에선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연설을 인용해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숲에서, 들판에서, 해변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싸울 것”이라고 외쳐 기립박수를 받았다.
젤렌스키는 대통령은 미국과 유럽 의회를 넘어 일본에도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화상 연설을 할 수 있도록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사히신문>은 17일 “미국과 유럽 의회가 받아들인 이상, (일본 국회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자민당 간부의 말을 전하며 “여야가 본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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