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시민들이 9일 비행기표를 구하기 위해 터키 항공 사무실 앞에 줄지어 서 있다. 모스크바/타스 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사람들만 정든 땅을 떠나는 게 아니다. 많은 러시아인들도 국제사회의 제재와 고립이 심화할 것을 우려해 외국으로 탈출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이 9일 보도했다.
이렇게 러시아를 떠나는 이들은 주로 전문직 종사자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국제사회의 제재가 갈수록 강화되면 러시아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어렵게 되는 등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또 러시아 당국의 시민 통제가 더 강화되면 러시아에서는 일상의 자유도 제약될지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다. 러시아 의회는 지난주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가짜” 정보를 퍼뜨리면 최고 15년형에 처할 수 있는 법을 통과시켰다.
반면 러시아를 떠날 기회는 국제사회가 러시아의 항공분야도 제재하면서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유럽연합(EU)과 영국, 캐나다 등이 러시아 항공기의 영공통과를 금지했고, 이에 맞서 러시아도 이들 나라 항공기의 러시아 영공 접근을 막았다. 이에 따라 러시아인들 사이에는 앞으로 외국 출국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를 떠나는 이들의 정확한 숫자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웃 나라의 러시아 여행객 숫자는 대략적인 흐름을 알려준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핀란드의 경우 국경을 넘어들어온 러시아인이 지난해 2월 2만7천명에서 이번 2월엔 4만4천명으로 늘어났다. 핀란드행 열차와 버스표는 연일 매진이다. 핀란드 국영 철도회사는 헬싱키-상트페테르부르크 간 열차편을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비자 면제국이거나 입국 절차가 느슨한 터키와 조지아 아르메니아 등으로 떠나는 러시아인도 많다. 조지아 경제부는 최근 며칠 사이에 입국한 러시아인이 2만~2만5천명이라고 밝혔고, 이스라엘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인 1400명에게 이민비자를 내줬다.
50대의 러시아 남자는 최근 열차로 핀란드 헬싱키로 왔다. 그는 “아내가 인슐린이 필요한데, 서방의 제재로 인슐린 공급에 문제가 생길까 우려된다”며 “독일로 가서 거기서 공부하는 딸과 당분간 지내려 한다 “고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쟁 반대 시위로 체포됐던 영화배우이자 감독은 풀려나자마자 짐을 꾸려 어린 아들과 아르메니아로 떠났다. 그는 “아르메니아에 도착한 뒤 경찰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집을 찾아왔다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여기선 오랜 지낼 경제적 여유가 없는데 돌아가는 건 무섭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최근 핀란드행 열차로 국경을 넘은 줄리아 자하로바(36)는 “아버지는 ‘떠나라 잘못하면 여기서 꼼짝도 못 할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며 “이런 상황에는 러시아에서 애를 낳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박병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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