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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푸틴의 전쟁’ 끝낼 힘은 오직 맞서 싸우는 시민에 있다

등록 2022-03-03 04:59수정 2022-03-03 07:47

[기고]
우크라이나 네티즌들이 러시아 침공에 대항하는 상징으로 에스엔에스(SNS)에 공유하고 있는 ‘성스러운 재블린 미사일’ 밈. 트위터 캡처
우크라이나 네티즌들이 러시아 침공에 대항하는 상징으로 에스엔에스(SNS)에 공유하고 있는 ‘성스러운 재블린 미사일’ 밈. 트위터 캡처

박노자 l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민간인 사망을 포함한 대규모 피해가 일어나면서 국제사회가 공분하고 있다. 러시아 출신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가 푸틴 정권의 잘못된 판단이 옛 소련 지역의 미래에 가져올 위기를 전망하는 긴급기고를 보내왔다.

한국 현대사에 유명한 대목이 하나 있다. 제2차 오일쇼크에 따른 물가 폭등, 그리고 저임금에 의존해온 고속 성장이 빚어낸 구조적 빈곤, 유신 정권의 폭정 등으로 인해서 1979년 10월16일에 들고일어난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을, 박정희는 군사적 폭력으로 진압하려고 했다. 부하들과 논의하는 자리에서 심지어 스스로 군대를 보내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고 못을 박을 정도였다. 초강경론을 지지한 경호실장 차지철은 아예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만~200만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미 현실 감각을 잃은 독재자와 그 간신들은 아예 제노사이드를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러다가는 한국의 지배체제 전체가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지배층의 ‘자기 보호’ 차원에서 본인만의 환상 속에서 살고 있었던 독재자와 그 일부 간신들을 즉석에서 ‘제거’했다. 그나마 “100만~200만명”이 죽는 악몽은 이렇게 해서 비켜나갈 수 있었다.

독재자들이 현실 감각을 상실하게 되는 메커니즘은 간단하다. 일단 아부를 통해 자리 보전이나 승진을 노리는 부하들은, 차지철처럼 ‘주상’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계속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그러는 사이에 독재자는 상황에 맞는 적절한 결정을 내릴 만한 객관적인 ‘자료’를 제공받지 못하고, 여차하다 일생일대의 실책을 저지르곤 한다. 박정희도 그러다가 결국 부하의 총에 죽었고, 푸틴도 이제 발을 빼기가 매우 어려운 ‘늪’에 빠져버린 것이다.

모든 동슬라브인들을 잠재적인 러시아의 애국자로 취급하고, 벨라루스나 우크라이나의 독립적 아이덴티티를 부정하는 대러시아 민족주의를 맹신하는 푸틴은, 러시아 군대가 적어도 드네프르강 동쪽의 우크라이나에서 “해방군” 대접을 받고, 우크라이나의 친미 정권은 바로 망명을 해서 전쟁을 속전속결로 마무리할 수 있으리라 애초에 믿었던 모양이다. 푸틴의 헤게모니적 민족주의의 농도를 잘 아는 그의 부하들은 그에게 오로지 “러시아를 은근히 사랑하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속마음”만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러시아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적인 자기도취의 결과가 바로 세계사에서 길이길이 남을 전략적 오판이었다.

“해방군”은 없었다. 러시아군을 맞이한 것은 화염병과 무한한 용기로 무장한 시민군이었다. 우크라이나군 병사들은 항복보다 ‘옥쇄’를 택했고, 비무장 민간인들은 맨몸으로 러시아군의 탱크를 막으려 한다. 푸틴의 상상과는 정반대로 이들 중의 상당수는 종족적 러시아인들이거나, 평상시에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이다. 저항하는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서는 종족이나 언어 등으로 인한 갈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종족적 유대인인 젤렌스키 대통령을 포함해서, 수십개 종족으로 구성된 우크라이나 주민들이 이제 하나의 다민족 국민 집단을 이룬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나 북한에서 항일 저항 서사가 국민 내지 인민 집단의 결속을 보장하듯이, 러시아 침략군에 대한 항전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앞으로도 단결시킬 서사로 자리잡을 것이다. 물론 군사적으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비해 열세다. 약 한두달 동안 러시아군은 대량 폭격과 포격으로 결국 우크라이나 정규군의 저항을 물리적으로 꺾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사이에 민간인 희생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러시아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골수에 사무친 원한만 무한대로 커질 것이다. 의분에 가득 찬 우크라이나 인민들의 유격전을, 그 어떤 친러 괴뢰 정권도 쉽게 진압하지 못할 것이다. 즉, 푸틴 정권이나 그 후속 정권이 아무리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배권을 추구하려 해도 그 지배는 늘 문제적이며 불안할 것이다. 서방의 지지까지 듬뿍 받아, 우크라이나인들의 결사적 저항은 수십년, 필요하면 수백년 갈 수도 있으리라고 본다.

나는 예언자가 아닌 이상 앞으로 러시아 지도부가 취할 구체적인 전술을 예견할 수는 없다. 서방과의 경제적 단절을 포함해 전쟁에 수반되는 비용 지출이 과도하다는 판단이 설 경우, 푸틴 정권은 어쩌면 우크라이나로부터 크림반도의 강제 합병 승인 같은 일부 양보를 얻어낸 뒤 군 철수를 시작할 확률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푸틴의 헤게모니적 민족주의를 공유하는 절반 넘는 러시아 국민이 이 전쟁을 여전히 지지하는 점이나, 일부 사업가나 금융관료 이외에는 러시아의 관료·기업인 엘리트 안에서 아직도 ‘조기 종전’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 표명되지 않는 점 등으로 봐서는, 일단 러시아 지도부가 구상하는 “큰 그림”은 우크라이나와의 ‘적당한 타협’보다 지속적인 강경 노선을 뼈대로 하고 있는 것 같다. 서방 은행에 예치돼 있는 러시아 자산의 동결에 러시아의 국가기관과 기업들은 서방에 대한 채무 불이행 등으로 맞대응하고, 서방 자본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대로 내자 총동원 식의, 수입 대체를 위주로 하는 ‘내포적 성장’을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훨씬 더 자급자족 모델에 가까운 “국가 총동원”을 하는 새로운 러시아에는 서방 대신에 중국이 자본과 정밀기계 등을 제공하고, 중앙아시아 같은 구소련 지역의 주변부는 저임금 노동력과 자원을 계속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대국주의적 민족주의를 신조로 하는 러시아가 리드하며 구소련 지역의 상당 부분이 포함될 유라시아 경제 블록은 많은 면에서 제국 일본이 구상했던 악명 높은 ‘대동아공영권’을 닮은 것으로 봐야 한다. 관료들의 통제를 받는 자본주의적 경제라는 측면도, 반서방(anti-Western) 민족주의를 이념으로 한다는 측면도, 극도의 군사화와 지리적 차별화(중앙아시아는 사실상 러시아와 중국의 신식민지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라는 부분도, 도조 히데키와 푸틴 양쪽의 미래 구상에 담긴 공통점들이다.

도조 히데키의 일제는 결국 거인 중국에 대한 무리한 침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지 못한데다가 훨씬 더 강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에 패망하고 말았다. 이와 달리 푸틴 침략의 피해자인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안정적으로 장기 지배는 못 해도 적어도 당분간 군사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규모의 나라다. 핵무기의 시대인 만큼 러시아와 미국의 군사적 정면충돌 역시 없을 가능성이 지배적이다. 그러니 일제의 군벌·관벌과 달리 푸틴과 그 후계자들은 어쩌면 구소련의 광활한 영토 안에서 관료집단의 지배를 받는 통제경제를 관리하면서 장기 집권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중 갈등이 증폭되는 가운데, 푸틴과 지배 그룹의 새로운 ‘유라시아 공영권’은 중국의 지원에 힘입어 생각보다 생명력이 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지배는 결코 영구적이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크라이나 국가가 군사적으로는 패배하더라도 우크라이나 인민들의 항쟁은 유격전 등의 형태로 분명히 지속될 것이다. 러시아 지식인 사회는 푸틴의 사실상의 종신 집권과 침략 전쟁에 매우 비판적이며, 앞으로 생활수준이 현저히 저하되는 만큼 러시아 민중의 저항도 적지 않게 일어나리라고 본다. 중국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취약한 푸틴 등의 ‘유라시아 공영권’은 앞으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혁명’의 중심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궁극적으로 침략과 독재를 끝낼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자각하고 투쟁에 나선 시민들에게만 있는 것이다. 지금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침략에 맞서서 보이는 용기는, 러시아인들에게도 오랫동안 영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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