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말리 군부정권을 지지하는 이들이 수도 바마코에서 군부정권 인사들의 사진과 함께 러시아 국기를 들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과 내전 중인 서아프리카의 국가 말리의 군부정권 대표단은 지난해 말 러시아를 급거 방문했다. 이들을 만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러시아는 말리 정부의 용병 계약과 아무 관계가 없다” “용병 고용은 말리 정부의 주권적 결정에 속한다”며 러시아 용병의 말리행을 용인했다. 이후 러시아 용병 기업 ‘바그너(와그너)그룹’은 말리에 대략 1000명 수준의 용병을 파견했으며, 대가로 말리의 광산 개발권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민간군사기업(PMC)으로 불리는 이른바 기업적 규모 용병에 대한 우려가 최근 다시 커지고 있다. 2000년 이후 미국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침공 과정에서 ‘블랙워터’ 같은 미국 군사기업이 민간인 살해 등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최근에는 바그너그룹으로 대표되는 러시아 용병 문제가 두드러지고 있다.
바그너 그룹이 말리에 손을 뻗을 수 있게 된 배경에는 말리를 식민 지배했고 독립 뒤에도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의 개입이 약화된 점이 있다. 프랑스는 2013년부터 말리에 군을 파병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과 싸워왔다. 그러나 최근 말리 정부군이 잇따라 쿠데타를 벌이자 “권력다툼에만 몰두하는 정부군을 대신해 언제까지나 싸워줄 순 없다”며 주둔 병력을 5천명에서 절반으로 감축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말리 군부정권은 곧바로 ‘와그너 그룹’에 손을 내밀었다.
■ 민간인 살해와 고문, 성폭력으로 악명
바그너 그룹은 2014년 우크라이나 내전에서 친러시아 진영 편에서 싸우며 처음 실체를 드러낸 이후, 시리아, 모잠비크, 리비아, 수단,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의 내전에 개입해 민간인 학살과 고문, 성폭력 등을 저질러 악명을 떨쳤다.
2019년 리비아에서는 바그너그룹 용병 1200여명이 반군과 함께 트리폴리 침공 작전 등에 참여해 정부군 포로를 살해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참전했던 전직 용병은 <비비시>(BBC) 방송에 “아무도 식량을 축낼 입을 남겨두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포로 살해 사실을 털어놓았다. 다른 정부군 병사는 “동료가 두 손을 들고 항복했으나 용병은 아랑곳하지 않고 총을 쏘아 사살했다”고 전했다.
지난해 7월 유엔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1년여 동안 정부군과 러시아 용병이 개입한 민간인 학살과 고문, 성폭행 사건이 500건 이상 발생했다는 보고서를 냈다. 석달 뒤인 지난해 10월 초엔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법무장관이 바그너그룹의 용병을 “러시아 교관”이라고 칭하며 이들이 일부 인권침해를 저질렀다고 인정한 뒤, 이들이 러시아로 송환돼 처벌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2018년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바그너그룹 용병의 행적을 추적하던 러시아 언론인 3명이 피살됐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 러시아의 외교적 영향력 확대 수단
미국과 유럽에선 러시아가 바그너그룹을 제3세계 국가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바그너그룹을 위장된 러시아군의 첨병으로 보는 것이다.
러시아가 용병을 국제 정치에 활용하는 이유는 우선 정규군보다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으로 보인다. 인권유린이나 불법행위같이 비난받을 만한 일을 하더라도 러시아 정부는 “우리와 관련 없는 일”이라고 부인할 수 있다. 또 용병은 정규군이 아니어서 임무 중 숨지더라도 전사자에 포함되지 않는 점을 이용해, 러시아 정부가 자국민들에게 실제 인명 손실의 규모를 은폐할 수 있는 국내 정치적 이점도 있다.
기업 규모 용병 활동은 냉전 종식 이후, 특히 미군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거치며 활발해졌다. 미군은 주로 요인 경호와 각종 시설 경비, 전투 지원 등을 이런 무장 용병에 맡겼다. 용병의 광범한 이용에 대해선 “국가 고유의 공적인 군사 임무를 사적 영역에 허용하는 것은 문제”라는 비판이 많으며, 실제로 미군 용병은 임무 수행 중 민간인 오인 사격 등으로 여러차례 물의를 일으켰다. 2007년 6월엔 미군에 고용된 ‘블랙워터’ 요원들이 이라크 바그다드 시내 한복판에서 미국인 요인을 경호하다 총기를 난사해 민간인 17명이 숨지는 일도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에서 군사력은 국가에만 허용되며 민간군사기업이나 용병 기업은 불법”이라며 바그너그룹과의 관련성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포린 폴리시>는 “바그너그룹이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은 유령기업이어서 그들이 불법행위를 저질러도 책임을 어디에 물어야 할지 알기 어렵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서방 언론과 전문가들 사이엔 와그너그룹과 러시아 정부의 밀접한 관계를 증언하는 목소리가 넘쳐난다. 국제문제 전문가인 언드라시 라츠는 미국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 올린 글에서 러시아 언론의 탐사보도를 인용해 ‘와그너그룹이 러시아 남부 몰키노에서 러시아연방군 정찰총국(GRU)의 특수부대와 군사 기지를 공유하고 있다’고 적었다. 또 장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교장관은 지난달 러시아 정부가 말리에 파병된 바그너그룹 용병과의 연관성을 부인한 데 대해 “그들이 러시아군 출신이고 러시아제 무기를 보유하고 러시아 군용기로 이동했는데도 러시아 당국이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한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꼬집었다.
■ ‘푸틴의 셰프’ 프리고진이 자금줄
바그너그룹은 정확한 실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배후로는 ‘푸틴의 셰프’로 불리는 예브게니 프리고진(60)이 꼽힌다. 프리고진은 러시아의 신흥 올리가르흐(재벌)이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2016년 미국 대선과 2018년 중간선거에 가짜뉴스 전파, 온라인 여론조작 등의 방식으로 개입한 러시아 기업 ‘인터넷 리서치 에이전시’(IRA)에 자금을 댄 혐의로 미국 재무부의 제재를 받았다. 당시 프리고진은 “미국인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들이 악마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199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소시지 도매업 등으로 돈을 벌었다고 알려졌다. 이때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청에서 시장의 보좌역으로 근무하던 푸틴 대통령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90년대 후반 고급 식당을 열었는데, 푸틴 대통령은 종종 외국의 귀빈들과 함께 이곳에 드나들었으며 그중에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곧 식자재 공급업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에 힘입어 크렘린과 각급 학교, 군대의 식자재 공급권을 따내며 사업은 번창했다. ‘푸틴의 셰프’란 별명이 붙은 건 이런 이력 때문이다.
프리고진은 군 경험이 없다고 알려졌다. 이런 사람이 군사조직인 바그너그룹을 운영하는 것은 푸틴 대통령과의 개인적 관계 등으로 러시아 정부와 확실한 연결고리 구실을 할 수 있는 적임자로 꼽혔기 때문으로 보인다.
바그너그룹이란 이름이 왜 붙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2014년 바그너그룹의 산파 역할을 한 러시아연방군 정찰총국 중령 출신인 드미트리 웃킨이 우크라이나 내전에서 썼던 호출부호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우크라이나 내전 때 바그너그룹 용병을 이끌었던 웃킨은 아돌프 히틀러를 숭배했고, 히틀러가 좋아했던 음악가인 리하르트 바그너의 이름을 호출부호로 썼다고 알려져 있다. 와그너는 바그너의 영어식 표기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