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의 투폴레프(Tu)-160 폭격기가 11일 벨라루스 상공 훈련을 위해 러시아 공군기지를 이륙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국경 지역 이주민 사태로 유럽연합(EU) 및 폴란드와 벨라루스의 대치가 격화되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이틀 연속으로 벨라루스 상공에 폭격기를 보냈다.
벨라루스 국방부는 러시아의 투폴레프(Tu)-160 장거리 폭격기 2대가 11일 폴란드와의 국경에서 60㎞ 떨어진 사격훈련장에서 폭격 훈련을 했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폭격기들을 벨라루스 상공에 보낸 것은 10일에 이어 두번째로, 첫날에는 투폴레프-22M3 장거리 폭격기가 출동했다. 벨라루스 국방부는 자국 전투기들이 폭격기에 맞서는 모의훈련을 함께 실시했다며, 러시아 폭격기의 벨라루스 상공 훈련은 정기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에이피>(AP) 통신은 러시아군도 자국 폭격기들이 4시간30분간 벨라루스 상공에서 훈련했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제3국을 겨냥한 훈련은 아니었다”고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폭격기들의 벨라루스 상공 전개는 폴란드군이 국경에 증파되고 유럽연합이 벨라루스에 대한 추가 제재를 공언한 상황을 염두에 둔 무력시위 성격이 분명하다. 드미트리 폴랸스키 유엔 주재 러시아대사는 기자들에게 “그것(폭격기 전개)은 폴란드-벨라루스 국경 지대의 대규모 군사력 증강에 대한 대응”이라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관계를 강조하며 러시아군은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유럽연합은 벨라루스 정부가 유럽을 곤경에 빠트리려고 중동 출신 이주민 2천여명의 폴란드 국경 월경을 유도하는 ‘하이브리드 공격’을 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2020년 대선 부정을 주장하는 야권에 대한 탄압을 이유로 벨라루스를 제재하고 있는 유럽연합은 이번 사태에 따라 추가 제재를 논의하고 있다.
폴란드와 맞붙은 벨라루스의 국경 지대에서 11일 한 어린이가 우유로 보이는 음료를 마시고 있다. EPA 연합뉴스
벨라루스 정부는 이주민들을 고의적으로 국경으로 보내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폴란드 국경을 넘는 것을 막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또 국경 지대에 폴란드 병력이 증파됐다며, 폴란드가 1만5천 병력과 대공 방어 무기를 배치한 것은 이주민들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공격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벨라루스 국방부는 “독립적으로, 또 우리의 전략적 동맹(러시아)과의 협정을 통해” 행동으로 대응하겠다고 경고했다.
1994년부터 집권해 ‘유럽 최장기 독재자’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사실상의 핵무기 사용 위협까지 내놨다. 그는 러시아 폭격기 전개를 언급하며 “(폴란드와 유럽연합이) 소리지르고 끽끽대게 놔두라. 그것들은 핵무기 사용이 가능한 폭격기들이다. 우리한테 다른 선택은 없다”고 했다. 그는 유럽연합이 추가 제재를 가한다면 벨라루스를 거쳐 유럽에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가스관을 차단할 수도 있다고 위협했다.
러시아는 이웃 벨라루스의 편을 들고 있다. 양국은 소련 붕괴로 갈라서기는 했지만 혈연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동질성이 강해 형제국처럼 지내왔다. 지난 9월에는 국가 통합을 추진하기로 발표하기도 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벨라루스는 유럽 방향에서의 외침을 막아내는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11일 이번 사태와 관련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두번째 통화를 했지만 ‘대화로 해결하라’는 취지의 말만 들은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러시아 국영 항공사 아에로플로트가 벨라루스 국경 지대로 이주민들을 이송하는 데 이용된 것으로 드러나 유럽연합의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크레믈린궁은 허위보도라고 주장했지만, 러시아 국영 회사가 제재를 받는다면 사태는 더 복잡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