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7일 폴란드 헌법재판소 앞에서 집권당인 ‘법과 정의당’ 지도자 야로슬라브 카친스키(왼쪽)와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을 나란히 독재자로 묘사한 사진을 들고 있다. 바르샤바/ AFP 연합뉴스
폴란드 헌법재판소가 7일(현지시각) 폴란드 헌법이 유럽연합(EU)의 법률에 앞선다고 판결했다. 지난 60년 동안 유럽연합 통합의 주춧돌 구실을 한 ‘유럽연합 법률의 우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폴란드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바르틀로메오 소한스키는 이날 “유럽연합의 조약은 폴란드 법체계에서 헌법에 종속되며, 폴란드 법체계의 다른 법률과 마찬가지로 헌법과 합치해야 한다”며 “유럽연합의 일부 법조항은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고 <로이터> 통신 등이 보도했다.
이에 대해 폴란드의 우파 집권당 ‘법과 정의당’의 지도자 야로슬라브 카친스키는 “폴란드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유럽의 모든 규정은 폴란드 헌법을 따라야 한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반면, 유럽연합 집행기구인 유럽위원회는 성명을 내어 폴란드의 판결이 “유럽연합 법률의 우위와 관련해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며 “유럽연합의 법률이 회원국의 헌법 조항을 포함한 국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유럽연합 법체계의 기본적 원칙”을 지키기 위한 조치에 나서겠다고 반발했다. 유럽의회의 다비드 사솔리 의장은 트위터를 통해 “유럽연합 법률의 우위는 논쟁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이를 위반하는 것은 유럽연합의 기본 원칙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고 못 박았다.
폴란드 헌재의 이날 판결은 지난 4월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총리가 유럽연합이 폴란드의 사법개혁을 중지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는지 판단해달라고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폴란드의 우파성향 집권당인 ‘법과 정의당’은 그동안 판사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사법개혁을 추진해 유럽연합과 갈등을 빚었다. 폴란드는 사법부에 남아있는 옛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불가피한 사법개혁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유럽연합은 사법부의 독립을 훼손하는 조처로 유럽연합의 법률과 규범에 어긋난다며 철회를 요청했다.
폴란드는 그동안 이번 사법개혁 문제뿐 아니라 언론 자유 문제와 동성애 등 성소수자의 권리 같은 여러 문제를 놓고도 유럽연합과 갈등을 겪어왔다.
이번 판결은 장기적으로 폴란드의 유럽연합 회원국 지위를 위태롭게 할 뿐 아니라 유럽연합 자체의 안정성에도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폴란드 정부는 이번 판결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의 유럽연합 탈퇴를 의미하는 ‘폴렉시트’(Polexit)의 계획은 없다고 선을 긋고 있다. 폴란드 국민 대다수도 유럽연합 잔류를 지지하고 있다. 폴란드 정부 대변인은 “이번 판결은 법적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 폴란드의 유럽연합 회원국 지위를 문제 삼은 게 아니다”라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유럽연합도 영국의 회원 탈퇴에 따른 뒷수습에 바쁜 마당에 당장 폴란드 축출과 같은 강경책은 부담스럽다. 우선은 다양한 방식으로 폴란드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이며 절충점을 찾으려 시도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유럽연합은 이미 지난달 폴란드가 유럽연합의 법률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기회복 자금 420억달러(50조원)의 지급을 보류한 바 있다.
박병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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