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이 국민당 일당 독재 시기를 거쳐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인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이 30일 별세했다. 향년 97세. 리 전 총통은 지난 2월 우유를 잘못 삼키는 바람에 폐렴 증세를 보여 타이베이 룽쭝(榮總)병원에 입원한 채 치료를 받고 있었다. 리덩후이 전 대만 총통.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국민당 일당 독재를 마감하고 대만의 민주화 이행기를 이끌었던 리덩후이 전 총통이 30일 노환으로 숨졌다. 리 총통은 지난 2월 폐렴 증세로 수도 타이베이의 한 병원에 입원해 170여일 동안 치료를 받아왔다. 향년 97.
리 전 총통은 일제강점기였던 1923년 타이베이 북서부 단수이에서 태어났다. 1944년 일본 교토제국대 재학 중 학병으로 강제징집된 그는 일본 패망 뒤 중국 상하이를 거쳐 대만으로 귀환했다. 귀국 뒤 국립대만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강단에 섰던 그는 미국 아이오와대를 거쳐, 1965년 코넬대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 출신이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당시 악명 높던 군 정보기관에 끌려가 유학 시절 활동과 관련해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71년 국민당에 입당한 그는 장제스 초대 총통의 맏아들인 장징궈 당시 총리에 눈에 들어 정계에 입문한다. 이후 그가 고위 공직을 맡을 때마다 ‘본성인(대만 태생) 출신 최초’란 수식이 따라다녔다.
장징궈의 배려로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타이베이 시장을 거쳐 부총통에 오른다. 그는 1988년 1월 장징궈가 숨지면서 총통직을 승계한 뒤, 2000년 5월까지 집권하며 다당제 도입을 포함해 대만이 군사독재에서 민주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초석을 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중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에서도 대만이 2000년 일찌감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대체복무제를 도입한 것은 리 전 총통의 최대 치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특히 리 전 총통은 중국 본토를 ‘수복 대상’으로 여기는 국민당 소속임에도 집권 기간 ‘대만인의 정체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는 퇴임 이후에도 대만의 국명을 ‘중화민국’이 아닌 ‘대만’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벌여왔다. 총통 재임 시절 학자였던 차이잉원 현 총통에게 양안 관계 재정립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맡겨 그를 정계로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 차이잉원 총통은 리 전 총통 사망설이 나돌았던 29일 이른 아침 병문안을 다녀온 바 있다.
이런 그의 주장은 민주화 이후 대만 사회의 여론 변화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대만국립정치대가 1992년부터 올해까지 실시한 대만인의 정체성과 관련한 연례조사 결과를 보면 이런 변화가 극적으로 드러난다.
대만국립대 선거정치연구센터 자료를 보면, 자신을 ‘대만인’이라고 여기는 유권자는 1992년 17.6%에서 2020년 67%까지 높아졌다. 반면 같은 기간 ‘중국인’이란 정체성은 25.5%에서 3.1%까지 낮아졌다. ‘대만인이자 중국인’이란 인식도 46.4%에서 27.5%까지 떨어졌다.
베이징/정인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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