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시진핑의 일생, 시진핑의 권력
시진핑의 일생, 시진핑의 권력
한달 전 중국 공산당이 국가주석 임기 제한 폐지 등을 담은 개헌안 제출을 발표했다. 인터넷 등 중국 여론에서 “과연 마오(쩌둥) 주석의 좋은 학생”이라는 반응이 눈에 띄었다. 시진핑이 마오쩌둥처럼 종신집권을 꿈꾼다고 비꼰 글이었다. 눈부신 경제·사회 발전에 걸맞지 않은 정치의 퇴보라는 비난의 화살은 분명 시진핑을 겨누고 있었다. 중국의 입법부인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어쨌든 개헌안을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키면서 시진핑 종신집권의 길을 터줬고, 그 첫걸음으로 국가주석 재선출도 만장일치로 확정지었다. 많은 이들은 적어도 5년, 길면 언제까지가 될지 모를 임기 동안 시진핑이 일당독재, 장기집권과 비민주성의 비난을 넘어설 수 있을지 묻는다. 그 이전에 우리는 거꾸로 그가 살아온 길이 일당독재, 장기집권, 비민주성을 향한 것이었는지 묻는다. 시진핑과 마오쩌둥의 이미지를 합성했다. 베이징/김외현 특파원 oscar@hani.co.kr, 사진 AP 연합뉴스, 그래픽 홍종길 기자 jonggeel@hani.co.kr
▶ 지난해 크게 흥행했던 중국 정치드라마 <인민의 이름으로> 등장인물 가운데 ‘착한 역’ 3인방은, 사심 없이 일밖에 모르는 말단 행정관료 이쉐시, 고인 물처럼 썩어가던 지역에 외부에서 새로운 기운을 몰고 온 지도자 사루이진, 그리고 정의롭게 부패 수사를 주도하는 허우량핑 등이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알아챘듯이, 이들의 이름을 한 글자씩 떼어내 조합하면 ‘시진핑’이 된다.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고 얼마나 조작됐는지 따지기 시작한다면 끝이 없을 테지만, 시진핑이 자신이 걸어온 인생을 통해 그런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한 건 사실이다.
‘문혁’ 탄압받으며 홍위병 가담 않아
아버지 흔적 남은 산시성으로 ‘하방’
육체노동자·수리공 등으로 일하며
농민의 삶 몸소 체험하는 기회로 사인방 퇴장 뒤 ‘반당 혐의’ 벗고
대학졸업, 정치국원 겅뱌오 비서 활동
개혁개방의 황금기 1980년대 맞아
17년 동안 푸젠성에서 관료 생활
극좌주의 벗어나 정치적 자산 쌓아 “중국의 권력은 공산당이 가지고 있고, 시진핑은 다만 공산당을 통해 그 권력을 행사하는 것뿐이다.” 중국 전문가인 케리 브라운 영국 킹스칼리지 교수가 지적하듯이, 시진핑과 그에게의 권력 집중은 당이 ‘새 시대’의 난국을 헤쳐가기 위해 내부적으로 이룬 합의라는 시각이 있다. 중국의 주요 모순이 제국주의도 식민주의도, 낙후한 사회생산도 아닌 ‘인민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수요와 불충분·불균형한 발전 사이의 모순’으로 규정된 오늘, 그들은 왜 시진핑을 지도자로 선택한 것일까?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선 시진핑의 탄생부터 2012년 집권까지의 과정을 차분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진핑 탐구생활, 시작해보자. _________
1. 혁명가의 아들
시진핑에게 중국공산당 1세대 원로 가운데 하나인 아버지 시중쉰은 가장 든든한 정치적 자산이었다. 1980년대 아버지 시중쉰과 함께.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해 3월 중국 관영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이 방영한 짧은 다큐멘터리 연작 ‘초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어릴 적 모습을 다룬 과거 이 방송사 프로그램 장면이 다시 나왔다. 중국중앙텔레비전 갈무리
2. 농민 속으로 그 시절 중국인 누구에게나 그랬듯이, 문화대혁명은 시진핑 가족의 일상을 송두리째 망가뜨렸다. 그가 9살이던 1962년 발생한 ‘류즈단’ 사건이 시작이었다. 서북 혁명 근거지의 창건자인 류즈단의 생애를 묘사한 소설을 작가가 류즈단의 전우였던 시중쉰에게 사전 검토를 맡겼는데, 이 작품에 등장한 또다른 전우 가오강이 미화됐다는 시비가 일었다. 시중쉰의 ‘전우’라 할 가오강은 마오쩌둥에 의해 반당분자로 찍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인물이다. 시중쉰도 반당 활동을 한 것으로 내몰렸고, 부총리 직위는 거의 즉각 해임됐다. 이 무렵 시진핑은 거실에 멍하니 앉아 수심에 싸인 아버지 모습을 자주 지켜봤다. 시중쉰은 마오쩌둥에게 농촌으로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그 청이 받아들여져 1965년 뤄양의 공장으로 무대를 옮겼다. 이 일로 부자는 7년 동안 헤어지게 된다. “검소하면서 어른들 챙겼다” 평가도
강직한 개혁파 낙마 지켜보며
“자기 뜻 내세우기보다 온건해야” 깨쳐
추진사업 실패에도 인사 영향 안 받아
중앙의 선택, 151등 위해 151명 뽑다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격려 힘입어
‘천안문 사태’ 고비 넘기며 ‘순항’
리커창 등 ‘4대 천왕’과의 경쟁 속
2007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입성
차세대 지도자 발판 확고하게 마련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면서 시중쉰은 같은 사건으로 다시 시안에 끌려가 홍위병의 추궁을 당했다. 시진핑이 살던 집은 몰수됐고, 결국 어머니 치신이 재직중이던 중앙당교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다니던 학교는 고위 간부 자제 학교라는 이유로 해산돼 다른 학교로 배정됐다. 이곳에서 시진핑은 린뱌오에게 박해받은 공군 부사령관 류전 상장의 아들 류웨이핑, 중국의 유명 바둑기사 녜웨이핑과 친구가 됐다. ‘싼핑’(세명의 핑)으로 불린 이들은 ‘반동의 자식’이므로 홍위병이 될 수가 없었다. 맞아죽을 뻔한 위기도 겪었다. 마오 주석 어록은 읽었지만 출신 탓에 급진적 운동에 가담할 수 없었던 시진핑은, 결국 홍위병의 무자비한 폭력 행위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2016년 5월 중국 베이징의 판자위안 골동품 시장에서 마오쩌둥, 덩샤오핑 조각상과 더불어 시진핑 흉상을 판매하는 모습.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니 시진핑 흉상은 500위안(약 8만5천원)에, 그보다 약간 작은 마오쩌둥 흉상은 150위안(약 2만6천원)에 팔렸다. 베이징/김외현 특파원
시중쉰 부부와 자녀, 손녀들. 왼쪽부터 아들 진핑, 작은딸 차오차오, 작은아들 위안핑, 손녀 난난, 시중쉰, 손녀 짠우, 손녀 샤오리, 치신, 딸 첸핑. <한겨레> 자료사진
3. 대학 입학과 아버지의 복권 시진핑은 하방된 ‘지식청년’ 가운데 모집한 공농병 청강생으로 선발돼 1975년 칭화대 화학공정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물리·화학 등 기초지식 습득이 먼저였다.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간단한 화학반응식도 알지 못해 힘들었지만, 유독 문학사에 흥미를 보였다. 그와 함께 화공과에 입학했던 천시는 그의 멘토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됐다. 천시는 대학 졸업 뒤 연구생으로 학교에 남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대 방문학자가 됐으며, 이후 칭화대 서기를 거쳐 지난해 정치국원이 되어 중앙조직부장 겸 중앙당교 교장을 맡고 있다. 시진핑은 저장성 서기 시절인 2006년 화공과 창립 60주년 행사에 축전을 보내 “칭화는 나를 길러주었고, 나는 칭화를 사랑합니다”라고 밝혔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가던 1976년 1월, 인후암에 걸린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났다. 잠시 복권됐던 덩샤오핑은 다시 모든 직무를 박탈당했다. 7월에는 주더가 사망했고, 같은 달 탕산대지진이 일어나 24만여명이 숨졌다.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나고 사인방이 붙잡혔다. 1975년부터 감시에서 풀려나 뤄양에서 가족과 ‘요양휴식’ 조처를 받은 시중쉰은 사인방의 퇴장을 계기로 당에 편지를 보내 복귀를 요청했다.
시진핑은 2007년 10월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9인)에 입성하며 정치적 입지를 탄탄히 다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4. 군부 경력 시진핑은 1979년 대학을 졸업한 뒤 정치국원이자 국무원 부총리 겸 중앙군사위 비서장이었던 겅뱌오의 비서가 됐다. 1970년대 후반부터 당 원로들은 고위 간부 자제들의 정치적 양성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자식을 상호 교육하거나 주변의 비서로 만들어 가까이 두는 방식 등을 활용했다. 겅뱌오는 후난 출신의 군인이자 외교관으로 1949년 건국 뒤 군복을 벗고 스웨덴, 파키스탄, 미얀마, 알바니아 대사 등을 역임하고 대외연락부장을 지낸 뒤, 당정군을 넘나드는 고위직에 올라 있는 상태였다. 시진핑은 군복을 입은 현역 군인으로서, 이 존경받는 군인의 시중을 들었고, 업무 스케줄, 내빈 접대, 연설문 초안 등을 맡았다. 이 무렵 그는 한 외교관의 딸과 첫번째 결혼을 했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치 않았다. 장인(외교관)이 주영국 대사관에 파견되면서 딸을 데리고 갔지만, 시진핑은 함께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1983년께 이혼했다. 한편, 마오쩌둥 사후 사인방을 제거한 화궈펑과 예젠잉의 신임을 얻었던 겅뱌오는, 뒤이은 후야오방-덩샤오핑 집권 이후 차차 쇠락했다. 그는 1981년 또는 1982년께 시진핑에게 좀더 장래가 있는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권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과 가까이 있는 것이 젊은 시진핑에게 부담이 될 것으로 판단한 셈이다. 이와는 달리, 겅뱌오가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시진핑 스스로가 직접 한계를 절감하고 그를 떠나기로 결정했다는 설도 있다. 곰곰이 유추해본다면, 군에서 계속 경력을 쌓으면 미래 선택권이 좁아지지 않을까 우려했을 가능성도 있다. 개혁개방이 한창 진행되던 당시 중국 사회의 주무대는 군에서 민간으로 옮겨가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_________
5. 가장 낮은 곳으로 1980년대. 개혁의 황금기이던 이 시절, 시진핑은 우선 가장 낮은 곳, 기층으로 가는 길을 기꺼이 선택했다. 이는 훗날 그를 가장 빛나고 단단하게 만들어준 선택이었다. 당시 농촌 지역엔 여전히 중국 인구 85%가 살고 있었다. 1982년 3월 시진핑은 베이징의 친지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허베이성으로 옮겨갔다. 어느 인민공사에 서기를 맡겨달라고 요구했더니, 허베이성 제1서기 진밍이 그를 정딩현 부서기에 배치했다.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300㎞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삼국지> 조자룡의 고향이었다.
1983년 허베이성 정딩현 부서기 시절 시진핑이 가벼운 차림으로 면화밭을 시찰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6. 개혁개방의 본고장에서 1985년 6월 시진핑은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이 됐다. 이후 닝더 서기, 푸저우시 서기, 푸젠성 부서기, 푸젠성장이 되기까지 17년 반 동안 시진핑의 관료 생활은 푸젠성에서 이뤄졌다. 개혁개방 바람이 가장 먼저 분 푸젠성과 광둥성에서의 근무는 성과를 내고 싶어하는 전국 관료들이 모두 바라던 일이었다. 시진핑에게는 고위 간부 자제라는 든든한 배경이 큰 힘이 됐다. 특히 당시 푸젠성 서기였던 샹난은 시진핑 아버지 시중쉰의 후원을 받는 개혁파의 대표 주자였다. 샹난은 시진핑이 샤먼에 도착하자 직접 그를 만나 개황을 소개해주면서 격려했다. 하지만 샹난은 같은 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가짜약 사건’에 휘말렸다. 당시 사건은 실제 피해가 발생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과장됐고, 개혁파 샹난에 대한 보수파의 반격 성격이 뚜렷했다. 샹난은 이 지역에서 농민들이 자금을 모아 세우는 향진기업을 장려했지만, 보수파는 이를 자본주의 부활이라고 비판하던 터였다. 푸젠과 일본 히타치가 함께 만든 합자회사 ‘푸르사’가 인기를 끌었으나, 보수파는 이마저도 ‘식민지 성격’이라고 백안시했다. 샹난은 강직했다. 이 사태에 앞서 디스코춤이 청년들의 열광과 방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당내 이론 권위자의 지적이 담긴 편지에, 샹난은 “우리 당과 정부가 청년들이 어떤 춤을 춰야 하고 어떤 춤은 춰선 안 된다고 규정하는 것이 반드시 통용될 수도, 타당할 수도 없다”고 반박했다. 답장을 받은 이론 권위자 후차오무는 샹난 퇴진 운동에 가장 적극적인 인사가 됐다. 이때 시진핑은 샹난의 기개에 탄복했지만 결국 정치 폭풍에 휘말리는 것을 보며, 중국 땅에서 자신의 뜻을 지나치게 강조하려 들면 끝이 좋지 않고 온건해야만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교훈을 새겼다. 시진핑은 샤먼에서의 3년이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유명한 인민가수 부인 펑리위안을 만나 두번째 결혼을 한 때가 이 무렵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부는 함께 살지 못하고 베이징과 푸젠에 각각 떨어져 사는 생활을 지속했다. 뒤이어 푸젠 산간 빈곤 지역인 닝더의 서기로 옮긴 시진핑은 관료들의 심각한 부패를 절실히 겪었다. 부동산 개발과 토지 매각 과정에서 뇌물과 불법 보수 등 갖은 종류의 부패가 횡행했다. 당·정부 공직자들이 자기의 배를 불리기 위한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시진핑의 주장은 이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시진핑 재임 기간 닝더의 부패 현실이 개선된 건 아니었던 듯하다. 오히려 몇년 뒤 매관매직과 예산 탕진, 동료 간 간통 등의 심각한 집단 부패 사건이 드러나 충격을 줬다. 1989년 6월 발생한 천안문(톈안먼) 사건 당시 군사 개입에 반대했던 시중쉰이 실각했다. 세상은 개혁개방의 중단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이뿐 아니다. 곧이어 동구권이 무너졌고, 중국 내 좌파는 개혁개방에 대한 비판을 더욱 노골화했다. 하지만 1992년 덩샤오핑은 ‘남순강화’로 개혁개방 유지를 선언했고, 그때 지방 관리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1990년 5월 성도인 푸저우시 서기로 승진한 시진핑도 격려를 받았다. 푸저우는 대만을 바라보는 항구로, 시진핑은 해외 투자, 특히 대만 자본과 동남아 화교 자본 투자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그가 정책결정에 참여한 일부 사업은 혹평에 시달리기도 했다. 특히 창러공항은 인근 샤먼에도 있는 국제공항을 시내에서 45㎞나 떨어진 곳에 왜 또 짓느냐는 비난을 받았다. 공항이 문을 연 지 5년도 되기 전에 11억위안의 손해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되면서 국가심계서가 타당성 검토 오류 및 과도한 부채 등을 지적하고 나섰다. 보고서가 나왔을 때 시진핑은 푸젠성장이었고, 이에 대해 채무 해결 방안 등을 만든 뒤 결국 샤먼공항에 관리권을 넘겼다. 샤먼공항이 창러공항의 자본 구조 개선에 나섰을 무렵, 시진핑은 이미 저장성 서기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 푸젠성장 시절 시진핑은 대만에서 민진당 출신 천수이볜 총통이 집권하는 최초의 정권교체를 목도했다. 양안관계의 긴장과 푸젠성에 대한 투자 악화가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관료들이 연루된 위안화그룹 밀수 사건이 터져 관료사회가 벌집을 들쑤신 듯했다. 영국 도버항에 도착한 냉동차에서 푸젠성 출신 밀항자 58명의 주검이 발견돼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푸젠성장 3년 동안 시진핑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_________
7. 중앙위원회 진입과 지도자 경쟁 1997년 중국공산당 제15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서 시진핑은 중앙위 후보위원에 당선됐다. 순위는 151명 가운데 151위, 꼴찌였다. 원래대로라면 150명으로 끊었을 텐데, 시진핑의 입성을 위해 1명을 증원했다는 관측이 팽배했다. 이때부터 당은 그를 지도자 후보로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자력으로 충분히 득표하지 못한 데는, 태자당에 대한 대표들의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의 입법부인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최근 국가주석 임기 제한 폐지 등이 담긴 개헌안을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키면서 시진핑 종신 집권의 길을 터줬다. 사진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10월1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 개막 연설 뒤 인사를 하는 모습. 베이징/로이터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7년 4월6일(현지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열린 만찬장에서 악수하고 있다. 팜비치/AP 연합뉴스
케리 브라운 지음, 도지영 옮김
우밍 지음, 송삼현 옮김 <시진핑 평전>(지식의숲, 2009) 베이징/김외현 특파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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