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지어 오는 여러 대의 탱크. 맨몸으로 두 손에 비닐 봉지와 옷을 든 청년이 첫번째 탱크를 막아선다. 탱크가 비켜가려 하자 청년도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 다시 막는다. 주변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 탱크와 함께 방향을 옮기기를 몇 차례, 그는 탱크 위에 올라선다. 탱크 안의 군인과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내려오더니, 탱크가 다시 전진하려 하자 또 뛰어가서 막아선다. ‘탱크맨’으로 불려온 이 청년의 모습은 세계인들의 머릿속에 1989년 중국 천안문(톈안먼) 사건의 상징적 장면으로 남아있다.
유혈 진압으로 마무리되면서 수백~수천명이 희생된 천안문사건이 지난 4일 28주년을 맞이한 가운데, 그동안 사망, 망명, 투옥 등 각종 설만 분분했던 ‘탱크맨’이 살아있으며 현재 중국에 거주하고 있다고 대만 <중앙통신>이 인권단체를 인용해 보도했다.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중국 인권운동을 벌이는 ‘공민역량’은 그동안 왕웨이린으로 알려졌던 이 청년의 이름은 실제 이름이 아니며, 그가 현재 중국에 거주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1999년 5월 천안문사건 진압 영상을 인터넷에 올려 중국에서도 실상을 접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때 ‘탱크맨’의 행방을 알게 됐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 자신은 외국에도 자신의 행위가 알려진 것을 모르고 있었고, 중국이 진정한 민주국가가 되기 전까지는 외국에 나가 ‘진짜 유명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고 이 단체는 전했다.
하지만 근 3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은 탱크맨은커녕 천안문사건의 의미를 잊어가는 분위기다. 심지어 다수의 정치·경제 엘리트층과 중산층은 당시 공산당이 무력 진압으로 권력을 유지하지 않았다면 경제 성장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파이낸셜타임스>가 보도했다. 중국 당국이 천안문사건과 관련한 모든 것을 통제하면서 ‘결과적으로 옳았다’는 인식이 짙어진 것으로 보인다.
올해도 중국에서는 엄격한 통제 속에서 기념행사가 전혀 열리지 않았다. 주말 사이 중국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웨이보는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이유로 사진·동영상의 유통이 아예 불가능했다.
연례 추모행사를 해온 홍콩에서도, 4일 저녁 집회에 온 참가자 수는 2008년 이래 최저를 기록했다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전했다. 지난해부터 민주파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추모행사 불참 움직임이 이어진 탓이다. 이들은 천안문사건의 기억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국양제’ 지지자들이 참여하는 추모행사가 홍콩 시민들에게 중국에 대한 애국심을 호소하면서 20년 전 중국으로의 반환 이후 홍콩의 문제를 외면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베이징/김외현 특파원
osca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