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피델 라모스 필리핀 전 대통령이 홍콩의 필리핀 총영사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라모스 전 대통령은 지난 8일 남중국해 영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 쪽과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파견됐다. 홍콩/AP 연합뉴스
지난달 12일 남중국해 중재판결로 날카롭게 대립했던 중국과 필리핀이 외교적 수단으로 갈등을 해소하려는 행보를 본격화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 한·미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골이 깊어지고 있는 한-중 관계와는 대조적이다.
홍콩을 방문중인 피델 라모스(88) 전 필리핀 대통령은 9일 기자회견을 열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의지를 피력했다. 지난달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제안한 ‘중국 특사’ 직을 수락한 뒤 첫 공식 행보에 나선 그는, “나는 항상 낙관적인 사람으로 최선의 결과를 찾으려 노력해왔다. 하지만 이 또한 중국 관료들의 태도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라모스의 홍콩 방문은 8일부터 닷새 동안 이어지지만, 구체적인 일정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앞서 에르네스토 아벨라 필리핀 대통령궁 대변인은 “라모스 전 대통령은 홍콩에서 ‘오랜 친구들’을 만날 것이며, 골프를 몇차례 치고 올 가능성도 있다”며 “이는 앞으로 외교 회담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라모스가 만날 인사들 가운데는 우스춘 중국남해(‘남중국해’의 중국식 표현)연구원 원장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라모스는 출발에 앞서 기자들에게, “그(두테르테 대통령)가 나한테 얘기한 건 ‘중국 친구 분들과 함께 우리(중-필)의 우정을 새로이 만들어주시라’는 것이었다. 난 그저 ‘아이스 브레이커’일 뿐”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라모스의 방문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관영 <신화통신>은 “남중국해와 관련해 (중-필) 양자대화로 가기 위한 첫번째 구체적 시도”라고 했다. <차이나데일리>는 ‘마닐라와 베이징은 돌파구를 만들 수 있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라모스의 방문과 관련해 베이징과 마닐라가 ‘로우 프로파일’(주목을 끌지 않는 태도)을 유지한 것은 양쪽이 사려깊게 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믿을만한 신호”라고 했다. 필리핀이 라모스의 방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중국도 여기에 호응했다는 뜻이다.
중국은 지난달 나온 남중국해 중재판결을 전면 부정하며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여기에도 다음 단계를 위한 포석이 내재돼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제프 스미스 미 외교정책위원회(AFPC) 국장은 지난주 베이징 주재 외신기자들을 만나 “중재 판결 이후 중국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보다는 낮은 수위에서 조절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중국의 태도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당선 이래 줄곧 중국에 대해 유화적 자세를 취해온 데 대한 호응이라는 분석이 많다. 두테르테는 당선 뒤 가장 먼저 방문하고 싶은 나라로 중국을 꼽았고, “중국은 돈을 가졌다. 미국은 돈이 없다”며 중국의 지원에 대한 소망을 감추지 않았다. 중재판결 전에는 자원 공유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남중국해 문제를 둘러싼 중국과 필리핀의 접근은,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한-중 관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특히, 남중국해 중재판결을 나흘 앞둔 7월8일 한-미가 사드 배치 결정을 발표한 데 대해, 중국은 한국에 ‘친구라면서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발표 이튿날인 <환구시보>는 사설에서 “8일 사드 배치 결정은 중국 외교가 남(중국)해 쪽으로 쏠려있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며 “이 또한 남의 위기를 틈타 남을 해치는 것”이라며 맹비난했다.
중국과의 경제협력에서도 필리핀과 한국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다. 지난주 아세안 관련 회의를 계기로 열린 중-필 경제장관 회담 뒤, 가우후청 중국 상무부장은 남중국해 문제가 양국 경제협력 및 교역·투자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반면, 같은 시기 주형환 산업통산자원부 장관과의 회담은 의례적인 만남 수준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베이징/김외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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